미국이 내민 ‘반도체 청구서’…미·중 싸움 한복판에 낀 한국

이재덕 기자

중국의 마이크론 메모리 제재 때

“한국 기업, 대체 물량 판매 자제”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동참 압박

반도체 관련 이미지. 미국반도체산업협회 제공.

반도체 관련 이미지. 미국반도체산업협회 제공.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에 맞서 중국이 미국 마이크론의 메모리 제품에 대한 보안 심사에 나선 가운데 삼성전자 등 국내 업체들이 미·중 반도체 갈등의 한복판에 내몰릴 처지에 놓였다.

중국이 마이크론의 메모리 판매를 금지할 경우,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메모리가 그 공백을 메우지 않도록 미국이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는 파이낸셜타임스(FT)의 보도가 나온 것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시장경제를 말하는 미국에서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얘기가 나왔다”며 불만을 내비쳤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은 중국에서 D램, 낸드, 이미지센서(CMOS) 등을 판매하고 있다. 오포·비보·샤오미 같은 휴대전화 제조사와 롱시스 등 서버용 저장장치 제조업체를 고객사로 두고 있다.

세계 D램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의 과점 체제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서 각각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한다. SK하이닉스는 우시 D램 공장, 충칭 후공정 공장, 인텔로부터 인수한 다롄 낸드 공장을 갖고 있다.

현재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CAC)은 마이크론이 중국 시장에 판매한 제품이 중국 내 핵심 정보기술(IT) 인프라의 공급망 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보안 심사를 진행 중이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에 따른 일종의 ‘보복’으로, 최대 ‘판매 금지’ 처분까지 나올 가능성이 있다.

중국 정부가 마이크론을 타깃으로 한 건 마이크론의 D램이 없어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통해 이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도 마이크론 제제로 삼성과 SK가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파이낸셜타임스 보도가 맞다면, 중국은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고려해야 할 처지다. 삼성과 SK가 마이크론의 공급분을 메우지 않을 경우, 중국의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은 D램을 구하지 못해 제품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

중국 최대의 D램 제조업체인 창신메모리(CXMT)가 일부 물량을 대체할 수는 있지만 이 업체의 주력 제품은 최신 모바일 기기에서는 더는 사용하지 않는 한 세대 전 제품인 ‘LPDDR4X D램’이다.

양국 갈등 아래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도 ‘미국이냐, 중국이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스마트폰·PC 등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제품에 들어가는 메모리 제품의 공급을 중국 시장에 한해 제한하는 건 명분도 없을 뿐더러 중국과 척을 지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게다가 중국 전자업계가 메모리 수급난 때문에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의 공급 부족·가격 상승이 이어지면 전 세계 시장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국내 기업들이 미국의 요청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 장비에 대한 중국 수출을 제한하면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한해서는 1년간 유예 조치를 내렸다. 중국 공장 문을 닫을 수 없는 삼성과 SK로서는 올해 또다시 유예 조치를 받아야 한다. 다른 업체 관계자는 “미국이 삼성과 SK의 ‘목줄’을 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마이크론을 제재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파이낸셜타임스를 이용해 먼저 ‘견제구’를 날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중이 강 대 강으로 가면 서로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이런 상황을 미국도 알기 때문에 마이크론을 제재하려는 중국에 경고하려는 수준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으로부터 관련 요청을 받았는지를 묻는 경향신문의 질문에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에서 산업부로 그런 연락이 온 적은 없다”고 답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한국 정부로부터 관련 요청에 대해 전달받은 게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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