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고통받는 학교폭력, 이 판결문을 보라

류인하 기자
경남 김해시 장유터널 안 인도로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기사와 관계없음) /  김정훈 기자

경남 김해시 장유터널 안 인도로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기사와 관계없음) / 김정훈 기자

모두가 고통받는 학교폭력, 이 판결문을 보라

지난 5월 한 아이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이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고작 10살밖에 되지 않은 초등학교 3학년 아이는 두 차례에 걸쳐 반 친구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학폭위 결과는 가해학생들에 대한 서면사과(1호) 및 교내봉사(3호)였다. 2차 폭행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조치 없음’ 결정이 내려졌다. 아이는 학교를 가지 못했다. 대신 병원을 다니며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충남도 재심위는 조치 없음 처분을 기각, 일부 가담학생에 대해 교내봉사 10시간의 징계를 내렸다. 아이 아버지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냈다. 가해자들은 솜방망이 처벌만 받고 멀쩡히 학교를 다니는데 왜 피해자인 우리 아이만 학교도 가지 못하고 고통받아야 하냐고 했다. 아이의 부모는 가해학생 5명과 이들의 학부모, 교장, 교감, 담임교사를 상대로 정신적·신체적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리고 법정다툼을 벌이던 중 아이의 아버지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무리했다.

모든 사안을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로 가져가는 학교폭력의 부작용은 이제 극단을 달리고 있다. 학폭위 앞에 모든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은 화해가 배제된 채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가고 있다. 학폭위원들은 학교장의 입김이나 가·피해학생의 교내 입지에 따라 고무줄 판단을 내린다. 학폭위에는 전문가가 없다. 누구도 일방의 주장을 법적 근거에 따라 판단할 능력이 없다. 교육부는 그러나 모든 사안을 학교장과 교사, 학부모들에게 일임한 채 뒷짐만 진다.

<주간경향>은 고인이 된 아버지가 학교와 가해학생 등을 상대로 낸 소송 결정문을 단독입수했다. 결정문 안에는 판사의 고민과 이 사건을 둘러싼 가해학생과 그 부모들, 교육감과 학교장, 교사 등이 피해아이를 위해 했던 노력, 그리고 피해아이가 피해를 극복하고 가해학생을 용서했던 모든 내용들이 담겨 있다. 또 학교폭력 문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주간경향>은 이 결정문에 담긴 울림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낫다는 판단 하에 전문을 공개하기로 했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화해권고 결정

결정사항

1. 교장인 피고 B는 교사들과 학교를 대표하여 원고들에게 교육자로서의 도의적인 책임과 유감 및 원고들이 겪은 아픔에 대해 깊은 위로의 뜻을 진심으로 표한다. 이 결정이 원고들에게 도달함으로써 피고 B가 원고들에게 위와 같은 진심어린 의사표시를 한 것으로 본다.

2. C(교육청)는 교육자치의 주체로서 학교 내에서 아이들 사이에 발생하는 학교폭력 기타 분쟁과 갈등에 관하여 학교가 교육적 관점을 최우선적으로 견지하면서 적절한 피해회복, 재발방지 및 평화적 갈등해결을 자율적으로 도모할 수 있도록 제반 절차의 개선과 학교에 대한 지원 및 다각적인 대책의 마련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3. 원고들은 피고들에 대한 소를 모두 취하하고, 피고들은 모두 이에 동의하며, 상호 이 사건에 관하여 향후 일체의 문제제기를 하지 않기로 한다.

결정이유

이 소송은 고인이 되신 A 아버님께서 상처입은 A를 위한 절박한 마음상태에서 진정한 사과와 피해회복, 확실한 책임을 강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는 뒤늦게나마 용기를 가지고 서로 대화하고 오해는 풀고, 마음을 전해서 서로 좀 더 이해를 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받고 나아가 서로 위로도 하는 귀한 시간을 학부모들 사이에, 그리고 아이들끼리 가졌습니다. 또한 진작 했어야 할 금전적 피해배상도 학부모들 사이에서 이뤄졌습니다.

아이들에 대해 필요한 교육과 상담도 했고, 무엇보다도 A가 이미 1년 4개월 전인 2017년 4월께 친구들이 정성을 다해 썼던 사과문 4장을 한 장씩 펼쳐 읽어보고 마음을 풀며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라고 말한 시간도 있었습니다.

대화, 사과, 용서, 이해, 피해배상, 교육, 상담 등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서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이의 소송은 소취하로 종결됐습니다.

그로써 고인이 생전에 뜻하셨던 바가 충족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짐작해 보면서, 이제 남은 교사들 및 지방자치단체와 A 가족들 간의 소송에 관해 결정사항과 같이 마무리되기를 희망합니다.

고인이 교사들과 지방자치단체에 원하셨던 것은 손해배상이 목적이 아니라, 교육자 및 교육자치단체로서의 진정한 책임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민사소송의 손해배상 법리로는 이 사건에 관해 교사들과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구성하기에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사들은 현행법상 틀 내에서의 주어진 규정과 권한에 따라 나름대로 이 사안을 잘 해결해 보려고 애써 온 것이 사실이고, 그에 관해 지방자치단체도 구체적으로 어떤 주의의무를 위반하였는지를 특정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처음에 A에게 발생한 피해가 적지 않았으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현행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상의 절차에 따라서 학교에서 진행되었던 내용들이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A의 피해를 해결해주지도, A와 급우들 간의 친구관계를 회복시켜주지도, 실수나 잘못을 한 아이들에 대한 확실한 교육이나 재발방지를 도모해주지도 못하였습니다. 아이들 및 학부모들 간의 분쟁과 갈등도 해결해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더 골이 깊게 되었습니다. 총체적으로 실패라고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결과가 빚어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비극적 소용돌이 속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절망적으로 휩쓸려 갔던 것처럼 담임선생님, 학폭선생님, 교감선생님, 교장선생님, 개개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업무에 따라 나름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별다른 결실도 없이 함께 고통을 받으며 무력하게 휩쓸려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규범적으로는 교장은 책임이 있다, 담임교사는 책임이 있다고 말을 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상의 학교폭력 처리절차 안에서 그들이 가진 권한이나 재량은 적어 보이고, 무엇보다도 과연 학교가 현행 학교폭력 처리절차 매뉴얼 안에서 아이들에 대해 교육적으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한지,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하는 여러 지점들이 있습니다.

일차적 교육권한을 가져야 하는 담임교사는 교육에서 배제된 채 사건 조사자의 지위로 전락하거나 단지 학폭위 처분 결과를 따르기만 하는 부수적인 지위에 머물고, 갈등 당사자인 아이들끼리는 막상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고 사과하고 화해하고 어떻게 다시 함께 사이좋게 놀 수 있는지는 전혀 배우지도 못한 채 상처와 자존감이 손상된 채로 각각 따로 방치되었습니다. 그런데 학교나 교장, 교사들이 이를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하는 상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현행 학교폭력 처리절차가 아닌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 책임은 누가 어떻게 져야 할까요.

모두가 고통받는 학교폭력, 이 판결문을 보라

한 가지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차 학폭위의 처분 결과 중에 ‘가해아이들과 피해아이의 학년 말까지 접촉 금지’가 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피해아이를 옆에 두고 잘 보살피고 보호하려고 애는 썼지만 가해아이들도 한 반의 제자들인데 담임선생님 입장에서 한 반에 있는 아이들을 학폭위 처분 결과에 따라 서로 놀지 못하게 하면서 수업도 하고 하루 일과를 보내야 하는 딜레마를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대체 어떤 교사가 자기 반 아이들을 그것도 10살짜리 남자아이들을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수업이나 놀이나 학교 일과를 보내야 한다는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결국에 피해아이는 다시 왕따를 당한다는 피해상황을 호소하고, 가해아이로 지목된 아이들은 ‘접촉금지’ 하래서 ‘접촉금지’했는데 왕따시키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한 반에 두고 하루종일 함께 일과를 보내야 할 담임선생님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모님들은 양쪽 다 화가 나고 답답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해서 교감이나 교장이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어떠한 적극적인 교육적 조치를 할 수 있는 것인지, 혹은 그렇게 하더라도 안전할 수 있는 자율적 권한이 그들에게 과연 학폭사안에 관해 있기나 한 것인지도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2차 학폭위로, 재심인 지역 학폭위로, 행정소송으로, 민사소송으로 모두가 함께 휩쓸려 밀려온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 부모들, 선생님들 모두의 삶이 파괴되어 버리고 학교는 제기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져야 하는 것일까요.

어찌되었든, 그래도 학교장으로서 교사로서 다른 교사들을 대표하고 학교를 대표해서 교장선생님이 A와 그 가족들에 대해 이 결정으로써 도의적 책임과 유감 및 원고들이 겪은 아픔에 대한 깊은 위로의 뜻을 진심으로 표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법적으로 피고 B 개인이 어떠한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 있지만, 오히려 그동안 조정기일 등 법원의 절차를 통해 법원이 알게 된 교장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마음 아프게 자신을 질책하면서 내적으로 깊은 도덕적 책임감을 교직자로서 느끼고 계셨습니다. A나 A 가족이 그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그 점을 안다면 오히려 학교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결정으로 결정사항 1항을 작성하였습니다. 담임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도 속사정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말로 굳이 또는 일일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모두 결정사항 1항의 행간에 다 담은 것으로 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교육자치단체로서의 C와 교육에 있어서의 대표자인 교육감은 다시는 이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 학교 안과 밖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결정사항 2항과 같이 노력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사건에 관한 법적 책임이 모호하다고 해서, 학교폭력 절차 매뉴얼을 지방자치단체와 상관없이 교육부에서 만든 것이라고 해서, 그리고 이 학교의 교사들에 대해 교육청을 징계했다고 해서, 이 사안에 관해 이 지역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는 교육자치단체와 그 대표자인 교육감의 책임이 끝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잘 연구하고 분석하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절차를 개선하고 학교를 지원하고, 무엇보다도 교육의 권한을 교사 및 학교에 제대로 돌려주고, 분쟁 해결의 자율성과 주도권을 갈등 당사자인 학생들에게 주는 한편, 실수와 잘못에서 배우며 문제를 잘 해결해 가면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육자치단체와 교육감, 교육청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찾기를 권합니다. 그 약속을 A와 가족들뿐 아니라 아직 공동 피고인 교사들, 그리고 한때 공동 피고였던 아이들과 학부모들 모두에 대해서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위와 같이 각 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써 피고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고인이 되신 아버지도 흡족해 하시지 않을까 조심스레 말씀드려 봅니다. A와 그 가족에게 위로와 평안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권합니다.

판사 임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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