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은 무엇을 지키는가

유정훈 변호사

미국 합참의장 마크 밀리의 이임·전역식이 지난 9월29일 열렸다. 미군 최고위직인 합참의장은 영향력이 크고 주목을 받는 직위이지만, 그의 이임사 중 한 부분은 이례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미국의 군대가 지키는 것은 국가, 집단이나 종교가 아닙니다. 군주, 폭군 또는 독재자도 아닙니다. ‘독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의 헌법, 미국이라는 가치를 수호하겠다고 서약했고, 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습니다.”

여기서 ‘독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명확하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칭한다. 밀리는 2018년 트럼프에 의해 합참의장에 임명됐지만, 대통령 자신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트럼프와 불편한 관계였다. 이임사를 통해 군 통수권자였던 전직 대통령의 행보를 비판했기에 논란이 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긍정적 반향을 얻고 있다.

밀리의 합참의장 재직 기간에 단 하나의 결점도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대표적으로 2020년 6월1일에 있었던 사건 때문이다. 그해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깔려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종차별적인 과도한 공권력 행사였기 때문에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를 외치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법과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후 도보로 인근 세인트존 교회로 이동해 성경을 들고 사진을 찍는 장면을 연출했다.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하려는 정치적 행보였다.

그 와중에 밀리가 트럼프를 수행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공무를 위해 백악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대통령을 따라 몰려가다 보니 그리 된 것이지만, 군복을 입은 합참의장이 대통령의 정치적 연출에 동행한 장면이라 큰 논란이 됐다. 밀리 의장은 “그날 그 장소에 가지 않았어야 했다”고 인정하고, 군의 국내 정치 개입이라는 부적절한 인상을 남긴 점에 대해 사과했다. 밀리 의장의 발언은, 그가 완벽한 인간 혹은 군인이어서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부적절한 행보에 동참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가치가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사건에 대해 사과한 밀리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그는 합참의장으로서 군을 정치로부터 지키기 위해 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2021년 1월6일 트럼프의 대선 패배 불복을 위한 의사당 폭동 사건이 발생하자 충격을 받은 밀리 의장은 트럼프가 군을 동원해서라도 자리를 지키려고 시도할 것을 우려해 어디에서 명령이 내려오더라도 합참의장 본인으로부터 직접 확인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밀리가 합참의장으로 재직하며 미군의 수호 대상은 미국 헌법이라고 발언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군인으로서 가진 일관된 소신으로 보인다. 이임사에서는 나아가 미군이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가치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최고위직 군인에게서 나온 발언이라 믿기 어려울 수 있고, 발언자가 누구인지 모른 채 들으면 인권 변호사 또는 진보 정치인의 연설로 짐작할 수준이다.

“우리가 흘리는 피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군이 피를 흘리는 이유는, 집회의 자유, 적법절차, 언론의 자유, 투표권, 그 밖의 미국인이기에 누릴 수 있는 모든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극단주의 정치 세력의 위협을 받는 미국의 상황 때문에 나온 측면이 있지만, 그의 이임사는 민주 국가의 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43년을 복무하며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고, 공화당과 민주당 행정부에 걸쳐 합참의장을 역임한 이의 발언이니만큼, 이를 개인 의견으로 축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군대는 나라를 지킨다고, 군인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무엇을 지킨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들이 모인 기관이나 집단은 공통의 가치, 납득 가능한 동기 부여가 있을 때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지켜야 할 가치가 확실한 군대가 명분 없는 군대를 이긴 사례는 군에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력을 독점하는 군이 어떤 대의명분으로 그 무력을 쓸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지구 최강의 군대인 미군은 미국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언론의 자유와 적법절차 보장을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돼 있다는데, 한국의 군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가. 한·미 동맹은 거래관계가 아니라 가치동맹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한국군과 미군이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공유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유정훈 변호사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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