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해방’ 옌스 판트리흐트 “남성과 페미니즘은 서로에게 필요하다”

임아영 소통·젠더 데스크

지난 100여년 간 여성들은 투표권을 쟁취했고 고등 교육과 유급 노동에 접근할 권리도 얻어냈다. 여성들은 지도력, 투지, 결단력 등 ‘남성성’으로 일컬어지는 자질을 활용해 ‘남성의 영역’에 진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임금 격차, 경제적 자립, 여성 대상 폭력 등 문제들이 산적했고 갈 길도 멀다. 성평등에 대한 저항인 ‘백래시’가 전세계적으로 거세지면서 여성혐오를 앞세운 가부장적 국가 지도자인 ‘스트롱맨’들이 부상하는가 하면 일부에선 ‘남성성의 위기’론을 퍼트리고 있다.

<남성 해방>(원제 Why Feminism is Good For Men)의 저자 옌스 판트리흐트(54)는 “남성과 페미니즘은 서로에게 필요하다”면서 이제 ‘남성’에게 주목할 때라고 말한다.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이 책은 독일어, 아랍어, 영어로 번역됐고 지난 1일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그는 책에서 “여성이 교육을 받고 노동 시장에 진입해왔지만 남성과 남성성이 하는 역할은 등한시했다”면서 “문제의 원인은 해결하지 않고 남겨둔 채, 그 결과를 완화하는데 온 힘을 쏟으라고 여성과 여성 운동에 촉구해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페미니즘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데 힘을 보태도록 남성이 있어야 하고, 남성은 스스로 더 잘 사는 데 힘이 되도록 페미니즘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남성과 페미니즘은 서로에게 필요하다”

판트리흐트의 주장처럼 가부장적 역풍에 맞서며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이롭다”는 메시지를 담은 운동도 확산되는 추세다. ‘전환의 남성성’을 내세운 비영리단체들의 국제적 연합인 ‘멘인게이지(MenEngage·남성을 참여하게 하자)’가 대표적이다. 멘인게이지 소속 단체는 2014년 400여개에서 현재 1100여개로 늘었다. 이 단체는 소년, 남성들과 협력해 남성성에 관한 유해하고 경직된 개념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남성 해방>의 저자 옌스 판트리흐트가 지난 15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다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남성 해방>의 저자 옌스 판트리흐트가 지난 15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다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판트리흐트는 자신이 ‘남성의 문제’에 주목한 것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그는 1988년 끔찍한 성폭력을 당한 여성을 만나면서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고, 1990년 공유주택에서 만난 친구들과 페미니즘에 대해 토론하면서 “이 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라고 깨달으며 남성성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후변화, 인종차별, 군사주의 등 남성으로서의 사회화가 세상의 불의에 기여한다고 느꼈다”면서 “변화하고 싶다면 나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에서 여성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어떻게 남성을 해방하고 어떻게 남성을 페미니즘에 참여하게 하는지’에 관해 연구했다. 2009년 참가한 멘인게이지 연맹 회의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남성들이 유럽 전역에 있음을 깨닫고 2014년 ‘해방자’라는 뜻의 ‘이맨시페이터(Emancipator)’를 설립했다. 그는 성평등을 위한 남성 교육 교안 ‘이매진(IMAGINE) 툴킷’ 제작에도 참여했다. 판트리흐트를 15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 주목하는 이유

-왜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 주목하는가.

“인종차별 문제는 누가 인식을 바꿔야 해결할 수 있는가? 단연코 백인이다. 그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차별과 젠더 폭력은 남성의 문제다.”

-남성을 위해서도 남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는데.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남성의 가부장적 폭력의 첫번째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폭력’이라고 명확하게 짚었다. 네덜란드는 남성의 기대 수명이 여성보다 낮은데 남성들은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돌봄에 관해 배울 기회가 적다. 남성들은 ‘나는 강인하고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다가 위기에 처한 뒤에야 이 문제를 인식한다. 그 대가는 ‘고립’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남성성은 남성에게 이롭지 않다. 남성이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남성성이란 가부장적 구조, 그밖에 억압 기제와 부단히 겨루는 하나의 전투’라고 했다.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호주 사회학자 래윈 코넬은 남성성이 시공간에 따라 여러 형태를 띤다고 말했다. 가부장제 하에서 가장 정당한 답을 찾는 유형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시대 백인, 이성애자, 서구인, 중산층이 그 예다. ‘공모적 남성성’은 패권적이지는 않지만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이점을 기꺼이 수용하고 혼란스러워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며 가부장적 현상 유지에서 나오는 ‘가부장제의 배당금’으로 이득을 본다. ‘종속적 남성성’은 열심히 노력해 자신을 증명하고 규범에 부합하려고 하는 유형이다. 이주 남성, 동성애자 남성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유형인 ‘주변화한 남성성’도 있다. 한 남성이 일터에서는 종속적인 지위이지만 가정에서는 지배적인 가부장이 되고, 자신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친구들과는 남들이 선망하는 오토바이 동호회를 만들지만, 검은 피부 때문에 경찰의 인종 프로파일링(특정 인종 집단을 우선적으로 용의 선상에 올리거나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것)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남성성은 하나의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성성이라는 지배 규범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남성은 없다.”

남성이 폭력을 내면화하는 과정

-남성도 폭력의 피해자일 수 있다고 했다.

“여성 대상 폭력을 멈춰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남성도 온갖 폭력의 주요 피해자이다. 그럼에도 남성 대상 폭력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은 덜 명확한 듯하다. 왜 남성들이 다른 남성에게서 위협을 당할 수 있음을 계속 인지하는 상태로 사는 것을 정상적으로 여기는지 물어야 한다.”

-남성이 폭력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설명해달라.

“정확히 말하자면, 폭력 가해자 대부분이 남성이지만 남성 대다수는 여성에게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 다만 남성 대다수가 폭력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도 여성 대상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상은 묵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당하는 불의에 공모하는 셈이다. 흔히 남성들은 이를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내면화한다.”

<남성 해방> 표지

<남성 해방> 표지

“한국 대통령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한국 대통령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면서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려 한다.

“‘평등’이 남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좋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성평등이 필요하고,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방향으로 바라봐야 한다. 한국 대통령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네덜란드에서도 성평등은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등 다른 문화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불평등은 미국,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어디에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 ‘(남녀의) 동등 임금(equal pay)’은 네덜란드에서도 큰 이슈다. 대통령께서 영감을 얻으면 좋겠다.”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크다.

“그렇다면 (성불평등은) 한국에서 더 명확한 문제다.”

-한국은 장시간 노동으로 남성의 돌봄 참여가 매우 부족한데 정부는 노동시간 규제를 더 완화하려 한다.

“네덜란드도 비슷한 상황이다. 정부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지난주 네덜란드 평등부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부가 유급 노동에 대해서만 발표하는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돌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음 세대, 나아가 서로를 위한 것이다. 여러 연구자들은 유급 노동과 무급 돌봄 사이의 ‘더 나은’ 구분이 가족에게 좋다고 말한다. 부부가 이를 더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 사회에 이롭다.”

<남성 해방>의 저자 옌스 판트리흐트가 지난 15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다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남성 해방>의 저자 옌스 판트리흐트가 지난 15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다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남성 없이는 더 나은 세상을 이룰 수 없다”

-<남성 해방>의 목표는 세상이 더 나아지는 것이라고 했다. ‘남성성’ 연구를 시작했을 때보다 얼마나 세상이 나아졌다고 보는가.

“세상이 여러 면에서 거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변화를 원하는 남성들의 운동도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반응은 직선이 아니라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이기 때문에 남성은 해결책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남성 없이는 더 나은 세상을 이룰 수 없다.”

-남성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남성을 정형화된 남성성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별 차이를 강화하는 접근법에서 벗어나 여성성과 남성성에 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고, 그것들을 바꾸는 ‘젠더 전환 접근법’을 만들어내야 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개체로서 우리 자신을 바꿔야 한다. 문제를 야기한 수준과 같은 의식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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