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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새 내 신체의 일부가 실험도구가 돼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데 사용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70여년 전 세포를 무단 채취당해 본인도 모르게 인류 의학사에 기여하게 된 미국 흑인 여성이 마침내 보상받을 수 있게 됐다.

BBC는 1일(현지시간) 자신의 세포를 도둑 맞았던 헨리에타 렉스의 유족과 렉스의 사망 전 채취한 암세포를 배양해 전 세계 실험실에 판매한 써모피셔사이언티픽(Thermo Fisher Scientific)이 전날 합의에 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날은 렉스의 103번째 생일이었다.

2017년 4월 6일 뉴욕시에서 열린 HBO의 “헨리에타 렉스의 불멸의 삶” 프로젝트 전시회의 관람객이 헨리에타 렉스의 초상화를 관람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2017년 4월 6일 뉴욕시에서 열린 HBO의 “헨리에타 렉스의 불멸의 삶” 프로젝트 전시회의 관람객이 헨리에타 렉스의 초상화를 관람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1951년 2월, 다섯 아이의 엄마였던 31세의 렉스는 질 출혈이 멈추지 않자 존스홉킨스 병원을 찾았다. 당시 이 병원은 가난한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드문 의료기관 중 하나였다.

검사 결과 렉스의 자궁경관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됐다. 담당의였던 하워드 존스 박사는 렉스에게서 채취한 암세포를 본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평소처럼 인근에 연구소를 운영하던 조지 게이 박사에게 보냈다. 게이 박사가 수집한 다른 암세포들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전멸했지만 렉스의 몸에서 나온 암세포는 20~24시간마다 2배로 무한 증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초의 발견이었다.

렉스는 병원을 찾은 뒤 8개월 만에 숨졌다. 그는 죽기 전까지 도둑맞은 자신의 세포가 죽지 않는 ‘불멸의 세포’로 불리며 전 세계 연구실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2021년 본인의 동의없이 세포를 채취해 이익을 취한 써모 피셔 사이언티픽에 소송을 제기한 헨리에타 렉스의 유족들. AP연합뉴스

2021년 본인의 동의없이 세포를 채취해 이익을 취한 써모 피셔 사이언티픽에 소송을 제기한 헨리에타 렉스의 유족들. AP연합뉴스

이후 이 세포는 ‘헬라’(HeLa)라는 이름이 붙어 소아마비 백신 개발과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암, 불임 연구 등에 활용돼 수많은 업적으로 이어졌다. 헬라 세포는 우주선에 실려 우주로 나가 무중력 상태에서의 실험에도 활용됐다.

렉스의 유족들은 렉스의 몸에서 나온 세포가 전 세계 연구실에서 계속해서 배양되며, 이익 창출에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70년대에 연구진들이 헬라 세포와 친족들의 유전자를 비교·연구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렉스의 세포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그 의미를 잘 몰랐다.

뒤늦게 진상을 알게 된 그의 유족들은 써모피셔사이언티픽을 상대로 2021년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합의에 따른 구체적인 보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유족 측 변호사 벤 크럼프는 1일 기자회견에서 양측 모두 만족한 합의였다고 밝혔다. 크럼프 변호사는 “렉스에 대한 착취는 지난 역사에서 흑인들이 보편적으로 겪어온 투쟁을 대변한다”며 “미국의 의학실험 역사는 의학적 인종차별 역사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존스홉킨스 병원은 순수 연구 목적으로 헬라 세포를 다른 연구실에 제공했고 이를 통해 단 한푼도 수익을 올리지 않았지만, 세계 각지의 연구소와 기업들이 헬라 세포를 이용한 연구 결과물이 창출한 부가가치는 천문학적이었다.

앞서 렉스의 유족은 헬라 세포를 사용한 연구기관으로부터 2020년 처음 보상을 받았다. 다만 이때는 보상이 아닌 기부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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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기반을 둔 생명과학기업 ‘앱캠’은 렉스 후손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헨리에타 렉스 재단’에 금품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재단은 렉스의 후손을 비롯해 과거 본인의 동의 없이 의료 연구에 동원됐다 피해를 입은 개인과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2010년 설립됐다. 앱캡이 생산하는 세포주(세포 배양을 통해 계속 분열·증식하여 대를 이을 수 있는 배양 세포의 집합)의 60~65%가 헬라 세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의 세포생물학 책임연구자이자 UC 샌디에이고의 교수인 사마라 렉 피터슨도 연구실 동료들이 그간 생산한 세포주 4개 당 100달러씩 재단에 기부하고, 앞으로 새로 만드는 세포주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율로 기부하기로 했다. 연구기관이 헬라 세포를 무단으로 실험에 쓴 데 대해 재정적인 배상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1년 렉스가 남긴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열어 렉스가 겪은 착취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당시 “렉스는 착취당했다”며 “신체가 과학에 남용된 수많은 유색인종 여성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했다.

미국 상원 메릴랜드 대표단은 최근 렉스에게 의회 황금 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법안도 발의했다.

렉스의 이야기는 과학 저술가 레베카 스클루트가 2010년 출간한 <헨리에타 렉스와 불멸의 삶>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을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오프라 윈프리를 주인공으로 제작돼 HBO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 최서은 기자 cielo@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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