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난쏘공이 남긴 것

손제민 논설위원
2011년 7월 1일 조세희 작가가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인권센터 창립 기념식에서 강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1년 7월 1일 조세희 작가가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인권센터 창립 기념식에서 강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22년 12월 어느 날 경의선숲길. 고층 건물들 사이에 조성된 산책로는 도심 속 오아시스 같다.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어르신들, ‘힙하다’는 입소문이 난 맛집들을 찾은 젊은이들로 붐빈다. 1906년 서울 용산과 평북 의주를 잇는 철로가 한 세기 만에 지하화되며 보행자에게 완전 개방된 이 길은, 사실 많은 이들의 눈물로 적셔져 있다. 숲길 시작 지점인 신계동의 철거민 강정희씨부터 끝 지점인 홍대입구역 주변 칼국숫집 두리반의 안종녀씨까지. 이 모두 ‘용산 참사’가 일어난 2009년 이후 도심 경관 재정비 과정에 밀려난 철거민들이다. 이들이 떠난 자리엔 어김없이 30층 높이의 마천루가 들어섰다.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김윤영씨는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이라는 책에서 “경의선숲길을 걸을 때면 주변에 아파트가 지어지며 내쫓긴 삶들을 기억해 달라”며 이 철거민들을 소개했다. 2010년 서울시 지가지수가 90.02, 마포구 89.22, 공덕역 83.01, 홍대입구역 72.69였으나 2016년 경의선숲길 개통 후 서울시 지가지수는 110.95, 마포구 114.23, 공덕역 132.05, 홍대입구역 170.37로 급등했다. 한 장소에 터 잡았던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개발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 이 부조리한 구조는 1978년 조세희 작가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에서 그려진 이래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1970년대 ‘난장이’ 일가가 25만원에 팔아넘기고 45만원에 거래된 아파트 입주권이 지금의 ‘난장이’들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고액이 되었다는 것뿐.

전직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유명 인사들뿐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이 25일 작고한 조 작가를 애도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이 더 나은 세상을 꿈꿔온 사람들에게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교과서에 실리고 입시에도 출제되면서 <난쏘공>은 2017년 문학책으로는 처음으로 300쇄를 찍었다. 이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세상은 왜 바뀌지 않았을까.

예순 넘어서도 집회 현장에서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취재하곤 했던 노작가는 생전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잊지 말아야겠다. 그가 달을 향해 쏘아올린 작은 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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