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망 위기

전력 넘쳐 일요일마다 ‘정전 경고등’ 켜졌다

박상영 기자

올해에만 원전 감발 4차례···태양광도 출력제어 단행 예상

지난해 서울 전력 자립도 8.9%에 그쳐, 송전망 확충 필요성

전력 다소비 기업 이전 유도 ‘차등 전기 요금제’ 거론도

전남 신안군 자라도에 위치한 24㎿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 신안군 제공

전남 신안군 자라도에 위치한 24㎿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 신안군 제공

정부가 전력 생산을 줄이려고 올해 봄부터 ‘날씨 좋은 일요일’마다 원자력발전소 출력을 낮춰 운영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근래 전라도와 경상도에 태양광 설비와 원자력발전소가 늘어나 전력 생산은 확대됐지만, 기업들 휴무 등으로 수요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자 공급과잉으로 인한 블랙아웃(대정전)이 발생할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오는 5월에는 제주 이외에선 사상 처음으로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에도 출력 제어가 단행될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한 근본 원인은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곳(수도권)과 많이 생산하는 곳(지방)의 불일치에 있다. 수도권과 지방을 잇는 송전망 확충과 함께 전력 다소비 기업의 지역 분산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전력 생산이 많은 지역은 전기요금을 낮추는 ‘차등 전기요금제’까지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25일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제출받은 ‘봄철 계통 안정화 대응에 따른 원전 출력 감발 운전 현황’을 보면 지난달 19일부터 이달 23일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일요일에 원전 출력을 낮췄다. 이달 16일과 23일 날씨가 흐렸던 점을 감안하면 날씨가 맑았던 일요일마다 원전 출력을 감소시켜 발전한 것이다. 한수원이 기업들의 전력 수요가 급감하는 연휴 기간을 제외한 다른 날에 원전 출력을 낮춘 사례는 올해가 처음이다.

‘꺼지지 않는 불’인 원전 출력을 일부러 낮추면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안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핵연료를 교체한 지 오래될수록 출력을 낮출 수 있는 여력도 줄어든다. 보통 경수로 원전은 1년 6개월마다 발전소를 세우고 2개월 이상 핵연료 교체작업을 진행한다.

한수원 관계자는 “원자로 출력을 80% 수준으로 낮춘 상태에서는 약 17일 정도 운영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까지 네 차례 원전 출력을 낮췄지만 평균 7시간이었던 만큼 아직 여력은 충분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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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LNG 발전소도 대부분 가동 중단

원전 출력을 낮추는 일은 예견됐다. 봄에는 냉·난방이 감소해 전력 수요가 낮아진다. 여기에 전체 전력 사용량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기업들이 일요일에 조업을 중단하면 전력 수요는 더 떨어진다.

반면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가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전력 생산은 증가했다. 기상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재생에너지는 특성상 발전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기가 어렵다. 결국 늘어난 재생에너지 발전량만큼 원전이나 석탄 발전량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올해 봄에 들어 산업단지 근처 등에 위치해 24시간 계속 가동해야 하는 일부 석탄·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제외하고 대부분 가동을 중단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대정전 사태는 대개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9월 15일처럼 과도한 전력 수요가 몰려서 발생하지만, 반대로 전력 공급이 수요를 큰 폭으로 웃돌아도 불안정성으로 일어날 수 있다. 기후환경단체인 기후솔루션 관계자는 “전력망은 자전거의 두 페달과 같이 매 순간 전력의 공급과 수요를 일치시켜 일정한 주파수와 전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대정전 위기는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 자체 때문이 아니다. 전력을 생산하는 곳(호남·경남)과 소비하는 곳(수도권)을 연결할 송전망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게 근본원인이다.

최근 태양광발전 설비가 밀집된 전라도 원전(한빛1·2·3·6호기)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발전이 적은 경상도 원전(신고리 2호기, 새울 2호기)도 출력을 낮춰 운영했다.

2018~2022년 최저 전력수요 및 태양광 설비용량. 자료 산업통상자원부

2018~2022년 최저 전력수요 및 태양광 설비용량. 자료 산업통상자원부

이미 제주도에서는 송전망 문제로 태양광·풍력 발전을 중단하거나 줄이는 출력 제어가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2015년 3회에 불과했던 출력제어는 지난해에는 132회로 늘어났다. 올해에는 이달 16일까지 26차례나 제어가 이뤄졌다.

전문가들은 제주에서 남는 전력을 육지로 보내는 전력망인 ‘제3 연계선’이 완공되는 2023년 말까지 이 같은 손해 발생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제주의 경우 대부분 풍력 발전에 대한 출력 제어가 이뤄지는데, 2015~2021년 누적 손실액이 약 5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한국풍력산업협회는 추산한다.

전력 다소비 기업 ‘지역 분산’ 시급

나아가 전력망이 부른 위기는 호남과 경남으로 확산하고 있다. 지난 14일 한국전력거래소는 태양광발전 시설을 보유한 공기업에 “16일 발전 출력을 제어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전력거래소가 제주 이외 지역에서 태양광 발전을 줄이기 위한 출력 제어를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일요일에 기업들이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 전력이 남아돌게 된다”며 “전력이 넘쳐 안정적인 공급이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 같은 출력제어가 앞으로 빈번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고 비수도권과 수도권을 잇는 서해상 송전망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는 육상에 전력망을 건설하는 작업이 주민들의 반발로 쉽지 않다는 현실 때문이다.

밀양 송전탑. 서성일 기자

밀양 송전탑. 서성일 기자

실제 동해안과 수도권을 잇는 육상 송전선로 준공이 늦어지면서 멀쩡한 발전소가 가동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한국전력이 230㎞에 달하는 선로를 잇는 ‘동해안~경기 신가평 500㎸ 송전선로 사업’을 추진했지만 환경 파괴 등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완공된 발전소가 놀게 되자 손실이 발생한 민간발전사들의 반발도 이어지는 상황이다.

또한 해상 송전망 건설도 만만치 않다. 해저 케이블을 1㎞ 부설할 때마다 10억∼20억원의 비용이 든다. 해저 케이블 건설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 피해 우려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산업부에서는 전기를 육상이나 해상 송전망 대신 배에 저장해 옮기는 ‘전기 운반선’까지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논의하는 실정이다.

산업부와 전력거래소는 휴일이 몰려 있는 5월 초를 전력 수급의 고비로 보고 있다. 태양광발전은 연휴에도 계속되지만 산업용 전력 수요는 휴일에 급감하는 만큼 태양광·풍력에도 사상 처음으로 출력 제어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태양광·풍력발전 사업자의 손실 보상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곽영주 대한태양광발전사업자협회장은 “올해 4∼5월 최대 4~10회 태양광발전 출력 정지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 경우 약 20~30% 수익이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송전망 확충과 함께 수도권에 집중된 전력 소비를 분산하는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지난해 기준, 서울과 경기도의 전력자급률은 각각 8.9%와 61.0%인데 비해 전남과 경남은 각각 171.3%, 136.7%로 대조된다.

한 대안으로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가 거론되고 있다. 전력을 생산하는 쪽은 전기요금을 싸게 해 기업들의 지방 이전을 유도하자는 주장이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역별 차등요금제를 도입했고 유럽연합(EU)도 내년 도입을 목표로 추진 중”이라며 “전력망만 확충해서는 공급에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수요의 지역 분산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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