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불복종 부추기는 자 누구인가

이중근 논설실장

지난 두 달여 동안, 중앙선관위원회를 둘러싸고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보수언론과 일부 의원들의 선관위 비판이 이어졌는데, 권순일 선관위원장에게 화살이 집중됐다. 지난 7일 권 위원장의 대법관 임기가 끝났으니 겸임하던 선관위원장 옷을 벗어야 함에도 자리에 남는 것은 물론 선관위 고위직 인사까지 하려 한다는 것이다. 좀 더 들어가면 권 위원장이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와 차기 대선 때 문재인 정부 편을 들어줄 사람을 뽑는 역할을 맡은 게 아니냐는 의심이다.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들이 동원됐다.

이중근 논설실장

이중근 논설실장

선관위가 선거 관리나 인사에서 편파성을 보였다면 그런 비판은 받아도 싸다. 하지만 이번 선관위 비판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 대부분이 선관위의 속성과 현실을 도외시한 억측에 억지였다. 퇴직한 대법관이 선관위원장 자리에 남아 인사를 주관하는 일이 이례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위원장과 사무처를 총괄지휘하는 사무총장(장관급)과 사무차장이 동시에 공중에 뜬 (선관위 정무직은 인사를 앞두고 사표를 낸다)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탓만 할 일은 아니다. 선관위 인사를 논의·의결하는 중앙선관위원 9명 중 2명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무처가 권 위원장에게 2주일만 더 남아 인사를 마무리해달라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대법관에서 퇴임한 위원장이 임기를 연장한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권 위원장이 그대로 떠났다면 조해주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이 인사를 주관하게 되는데, 그는 지난해 초 야당이 문재인 대통령 후보 캠프 출신이라며 국회를 보이콧한 명분으로 삼은 사람이다. 오히려 ‘즉시 퇴임’이 무책임하다고 볼 수도 있다.

선관위 사무총장·차장 인선 절차도 사실상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역대 모든 차장이 총장으로 승진했고, 차장은 2~3명의 내부 인사 중에서 뽑는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 인사는 사무차장을 뽑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마저 외부 인사를 이 자리에 임명하지 않는 한 문제시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언론이 사무총장·차장 인사를 주목한 적이 없다. 이런 일에 유독 보수언론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니 선관위 직원들이 어리둥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권 위원장이 여당 편을 들었다는 것 또한 말이 안 된다. 지난 총선 당시 선관위는 ‘비례한국당’의 당명 사용은 불허했지만, 뒤이어 ‘미래한국당’은 허용해 꼼수 위성정당 논란을 자초했다. 이 결정으로 정의당 등 진보진영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처음 투표권을 받아든 고3 교실에 정치 바람이 분다는 이유로 서울시교육청의 모의투표를 막은 중심에도 권 위원장이 있었다. 그런데도 보수 쪽에서 권 위원장을 겨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명한 그가 보수 편에 설 줄 알았는데 거꾸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재명 경기지사 무죄 판결의 논리를 제공한 것을 증좌로 내민다. 이른바 ‘배신자 프레임’을 씌운 셈이다. 진영 논리로 헌법기관을 옥죄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선거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 절차이며, 선관위는 선거에서 심판 역할을 맡은 기관이다. 이번 일을 비유하자면 보수세력이 지레짐작을 진실인 양 우겨대며 심판의 멱살을 잡고 흔든 격이다. 더 큰 문제는 권 위원장 비판 뒤에 태극기부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점이다. 태극기부대는 지금도 ‘4·15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지난 총선 결과에 불복하고 있는데, 권 위원장이 자리 욕심에 여당 편으로 돌아섰다고 지목한 사람들이 이들이라고 한다. 선관위에 대한 보수파의 압박이 지속·강화될 것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최근 보수진영에서 지난 선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잦다. 부정 의혹으로 선거 재판이 유독 많다는 것에서부터 재판이 더디다는 것까지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40여일 앞으로 다가운 미 대선에서 우편투표제를 공격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할 뜻을 시사하고 있다. 만약 트럼프의 선거 불복 전략을 국내 극우세력이 차용한다면 대단히 비극적인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권 위원장이 21일 주재한 선관위 전체회의에서 관행대로 김세환 사무차장이 사무총장으로 선임됐다. 후임 차장에는 박찬진 선거정책실장이 이견 없이 뽑혔다. 권 위원장은 별 의견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인사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튿날인 22일 권 위원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이제 선관위의 중립성을 의심하고 권 위원장을 모욕한 사람들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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