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시간이 무의미한 노동자들

3일 동안 11시간 휴식…과로사요? 우린 이미 ‘시체’입니다

김지환 기자

(상) 퇴근하지 못하는 특례업종

<b>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b> 항공기 지상조업 노동자에게 연장노동은 일상이다. 근로기준법 59조에 따른 특례업종이라 사용자가 근로자 대표와 서면합의를 하면 근로시간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비행기 날개 밑 그늘에서 쉬고 있는 인천국제공항 지상조업 노동자. 공공운수노조 제공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항공기 지상조업 노동자에게 연장노동은 일상이다. 근로기준법 59조에 따른 특례업종이라 사용자가 근로자 대표와 서면합의를 하면 근로시간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비행기 날개 밑 그늘에서 쉬고 있는 인천국제공항 지상조업 노동자. 공공운수노조 제공

육상·수상·항공운송 등 5개 업종
서면합의로 근로시간 조정 가능
사실상 ‘무제한 연장근로’ 부여
결혼·취미 등 ‘보통의 삶’ 못 누려

“연애할 시간조차 없어요. 그러다 보니 노총각도 다른 직종에 비해 많고요.”

항공기 지상조업사 ‘샤프에비에이션케이’(샤프항공) 인천지점에서 일하는 A씨는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된 지상조업 노동자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상조업이란 항공기 유도·견인, 항공기 내·외부 청소, 급유, 수하물·화물 탑재 등의 업무를 말한다. 항공기가 지상에 있을 때 필요한 업무는 모두 지상조업 노동자들의 손을 거친다.

공항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기 때문에 샤프항공 노동자들은 교대제 근무를 한다. 오전조는 아침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것이 기본 일정이다. 하지만 오후 4시에 ‘칼퇴근’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A씨는 “기본적으로 3시간 잔업이 일상이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직원이 줄었는데 이후 충원이 여의치 않아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라며 “저녁 6~7시에 출근하는 오후조도 다음날 새벽 3~4시에 퇴근하지 못하고 연장근로를 한다”고 말했다.

연장근로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된 현실은 연애, 취미생활과 같은 노동자의 일상을 앗아갔다. A씨는 “입사했을 때 노총각이 많아서 놀랐다. 그때 노총각이었던 분들이 혼기를 놓치다 보니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다. 개인 취미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장시간 노동은 건강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는 “예전엔 암에 걸린 분들도 있었다. ‘2급 발암물질’로 취급되는 야간노동 영향 같은데 정확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며 “출퇴근하는 직원들 얼굴을 보면 피로에 절어 있다는 게 느껴진다”고 전했다.

■‘노동자 자유이용권’ 근로시간 특례제도

공항 지상조업, 월 63.4시간 ‘연장’
‘항만 하역작업’ 크레인 조종사는
툭하면 주야간 연속 24시간 근무
연장근로 월 최대 250시간이나 돼
“21세기에 이렇게 일하는 데 있나”

경향신문이 입수한 올해 2월 샤프항공 인천지점 연장근무 내역표를 보면 직원 94명 중 1명을 제외하곤 모두 연장근무를 했다. 월평균 연장근로시간은 63.4시간이다. 한 달 동안 연장근로를 104.5시간 한 노동자도 있었다. 주 평균 연장근로시간은 15시간으로 주 52시간제에서 상한인 ‘12시간’을 훌쩍 넘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으로 정하고 있다. 샤프항공이 이 근로시간 규제를 우회해 장시간 노동을 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근기법 59조(근로시간 특례) 때문이다. 근로시간 특례업종은 사용자가 근로자 대표와 서면합의를 하면 근로시간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늘릴 수 있다.

특례업종은 5년 전 대폭 줄었다. 버스 기사의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잇따르자 국회는 2018년 3월 근기법을 개정해 특례업종 수를 26개에서 5개로 축소했다. 아울러 특례업종에서는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 휴식을 보장하도록 했다.

특례가 유지된 5개 업종은 육상운송업(노선여객자동차 제외)·수상운송업·항공운송업·기타 운송 관련 서비스업·보건업이다. 이들 5개 업종에만 110만명가량의 노동자가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항공기 지상조업은 업종 분류상 ‘기타 운송 관련 서비스업’에 포함되기 때문에 여전히 장시간 노동이 가능하다.

샤프항공 노동자들도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 주 52시간 근무를 한 적이 있다. 2016년 5월21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샤프항공지부가 설립됐을 때다. 김진영 지부장은 “노조를 세운 뒤 회사에 주 52시간만 근무하겠다고 말했다. 오전조 직원들이 해가 떠 있는 시간에 퇴근한 게 처음이라 정말 좋아했다. 동료들끼리 을왕리 조개구이집에 가서 소주를 한잔할 기회도 생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 52시간 근무는 채 몇주를 가지 못했다. 샤프항공지부가 설립된 지 6일 만에 기업노조가 생겼기 때문이다. 조합원이 더 많았던 기업노조가 교섭대표노조가 된 뒤 사측과 근로시간 특례 적용 합의를 했다.

A씨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그리고 급여가 낮다 보니 노동자들도 할증임금을 받을 수 있는 연장근로를 해 부족한 생활비를 벌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교섭대표노조와 달리 우리 지부는 근로시간 특례는 독소조항이라고 생각한다. 장시간 노동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결국 회사고, 노동자는 소모품이 되는 구조”라며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느냐’고 말하는 직원들을 만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인천신항에서 암벽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노동자들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항만하역도 업종 분류상 수상운송업에 해당해 근로시간 특례가 적용된다. 항만 노동자 B씨 제공

인천신항에서 암벽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노동자들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항만하역도 업종 분류상 수상운송업에 해당해 근로시간 특례가 적용된다. 항만 노동자 B씨 제공

■연장근로시간이 되레 더 긴 항만 노동자

인천신항에서 암벽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노동자들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항만하역도 업종 분류상 수상운송업에 해당해 근로시간 특례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암벽 크레인 조종사들도 지상조업 노동자들처럼 교대제 근무를 한다. 한 항만하역사를 보면 주간조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일한다. 야간조는 오후 7시에 출근해 다음날 오전 7시까지 근무를 한다. 한 달에 41시간은 기본적으로 연장근로를 하는 구조다.

문제는 이 연장근로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상 24시간 연속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조 인원이 부족하거나 배 일정에 따라 일이 몰리면 주간조라 해도 오후 6시에 퇴근하지 못하고 야간조 근무 지원을 나가야 한다. 이러면 오전 8시에 출근해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일하게 된다. 크레인 조종사 B씨는 “주간조지만 야간조 지원근무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이 경우 ‘24시간 근무’를 하고 오전 7시에 퇴근한다. 집에서 잠을 잔 뒤 다시 오후 6시에 출근해 또 24시간 근무를 하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사흘간 11시간만 쉰 것”이라며 “21세기에 이렇게 근무하는 데가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크레인 조종사들의 월평균 연장근로시간은 최소 150시간이고 250시간가량 되는 노동자도 있다고 한다. 기본근로시간보다 연장근로시간이 더 긴 기형적 구조다.

B씨는 “명절에도 설, 추석 당일만 쉬고 근골격계 질환을 앓는 동료들이 적지 않다. 근무시간이 길다 보니 예민해져서 사소한 걸로 동료들끼리 자주 싸운다”고 말했다. 이어 “인력도 부족한 데다 처음 입사하면 시급이 거의 최저임금 수준이라 장시간 노동의 악순환에 빠져든다. 회사가 이런 상황을 악용하고 있다”고 했다.

B씨는 특정 주 최대 69시간 노동을 허용하는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사실 큰 감흥이 없고 내 얘기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근로시간 특례제도 때문에 이미 주 69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 요즘 과로사 우려가 나오던데 우린 이미 시체인 셈”이라고 말했다.

항만하역 노동자들은 11시간 연속휴식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때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는 2019년 8월 고용노동부에 제출한 ‘특례업종 실태조사 및 제도개선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대체로 특례 도입을 합의한 직종에서 주 52시간 초과 근로가 발생하며 특히 하역직, 장비직, 정비직에서 장시간 초과근로가 많이 발생하지만 11시간 이상의 연속휴식시간 보장은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노동계는 근로시간 특례제도가 사용자에게 ‘노동자 자유이용권’을 부여하고 있어서 이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노동자 건강 손상으로 이어지는 무제한 노동을 노사 합의 대상으로 남겨두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공공운수노조는 “주 12시간 연장근로 상한 규제조차 받지 못해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이 즐비하다”며 “노동부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 의견 수렴 과정에서 근로시간 특례업종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듣고, 이들의 살인적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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