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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후보의 18억 의견서 논란···이것은 ‘카르텔’이 아닌가요?

이혜리 기자
권영준 대법관 후보자가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참석해 있다. 성동훈 기자

권영준 대법관 후보자가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참석해 있다. 성동훈 기자

권영준 대법관 후보자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할 때 김앤장 법률사무소 등 대형 로펌으로부터 돈을 받고 ‘법률 의견서’를 써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국회에 제출된 자료를 보면, 권 후보자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로펌에 법률 의견서 63건을 써주고 18억원 가량의 수입(필요경비 공제 후 6억여원)을 올렸습니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논란은 ‘법 위반이냐, 아니냐’에 집중됐습니다. 야당 청문위원들은 변호사가 아니면 법률 관련 업무를 금지하는 변호사법, 공무 외 영리목적 업무를 금지하는 국가공무원법 등에 저촉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권 후보자는 법률 의견서 작성은 ‘금지된 영리행위’도 아니고 법 위반도 아니라고 반박했고, 여당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법 위반만 아니라면 법률 의견서를 써주고 고액을 받는 건 괜찮은 것일까요? 핵심은 권 후보자가 대법관으로서 재판의 공정성, 혹은 외관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는 법률 의견서에 얽혀있는 구조와 맥락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청문회에서는 부각되지 않았지만 권 후보자는 법조계 엘리트 모임인 ‘민사판례연구회’ 회원이기도 합니다.

가진 자가 사는 ‘교수의 법률 의견서’

법률 의견서 논란이 일자 권 후보자는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국재중재 사건에서 전문가의 의견서와 증언은 심리를 위해 중요하고, 국내소송 사건에서도 선례나 선행 연구가 부족해 전문가의 법리 분석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권 후보자는 국회 서면답변서에서 “법학교수가 로펌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일반적인 시각은 재검토 돼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법학자들의 의견서 제출은 국내외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진다”며 “법학자들이 의견서를 제출할 정도의 사건들에는 대체로 법관 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변호사들이 소송대리인으로 관여하므로 학자들이 객관성·신뢰성·일관성을 잃은 의견서를 제출하면 그 의견서는 곧바로 불신과 탄핵의 대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법조인들의 말은 권 후보자 설명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국립대학 교수가 자신의 연구내용을 소송 일방 당사자 승소를 위해 제공하고 거액의 돈을 받은 것 자체도 부적절하거니와 법률 의견서는 아무나 의뢰할 수도, 아무나 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법률 의견서 1건에 수천만원에 달하는데 이 비용을 감당할 소송 당사자는 많지 않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충분한 소송 당사자나 대형 로펌에 사건을 의뢰하고 서울대 법전원 교수에게 법률 의견서를 맡길 수 있습니다. 결국 법정에서의 싸움이 사실과 논리의 대결을 넘어 ‘돈 싸움’이 되는 셈입니다. 여타 법대 교수들이 흔히 이런 의견서를 쓰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주로 서울대와 같은 유명 대학 교수들에게 의뢰가 몰리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대법원 대법정과 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법원 대법정과 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송에서 법리에 대한 전문적 검토가 필요하다면 재판부가 법정에 전문가를 불러 증인으로 신문하거나 기존에 발행된 논문·보고서를 증거나 참고자료로 제시하고 공방하는 정식 절차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률 의견서 제출은 비공개로 이뤄집니다. 재판부에 제출됐다는 권 후보자의 법률 의견서가 판결문에 드러난 사례도 물론 찾을 수 없습니다. 권 후보자가 얼마나 많은 법률 의견서를 썼는지 전체 규모가 확인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비밀리에 제출되는 법률 의견서는 재판부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법조인들의 말입니다. 한 법조인은 “판사 입장에서 서울대 법전원 교수의 의견서가 들어오면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법조인도 “대형 로펌 사건에서 서울대 법전원 교수의 의견서가 제출됐을 때 판사의 심증에 영향을 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언론에 공개된 권 후보자의 법률 의견서 1건을 보면 단순 학술 분석을 넘어 소송 일방 당사자를 옹호하며 구체적 논리를 설파하는 내용입니다. 권 후보자는 대법관이 되면 관련 사건을 회피하겠다고 했습니다만, 권 후보자가 어떤 사건에서 누구의 의뢰를 받아 법률 의견서를 써줬는지 소송 당사자도 알아야 기피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권 후보자가 법률 의견서를 써준 나머지 62건이 어떤 사건과 관련된 것인지는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권 후보자는 ‘민사판례연구회’ 회원

법조계에선 법률 의견서 만큼이나 권 후보자의 이력 하나를 주목합니다. 그가 법조계 엘리트 모임인 ‘민사판례연구회(민판연)’ 회원이라는 점입니다. 권 후보자는 2007년 민판연에 가입해 현재까지 16년 가량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민판연은 민법 대가인 곽윤직 전 서울대 교수가 만든 단체입니다. 서울대 법대, 남성, 서울중앙지법 초임 판사 중심으로 선발해 회원 가입을 받았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폐쇄적 모임이었는데, 법원 내에선 대법관·법원장·법원행정처 간부 등 요직에 있던 법관들이, 법원 바깥에선 김앤장 변호사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습니다.

회원들끼리 지속적으로 모임을 갖는 등 유난히 끈끈한 관계 때문에 전관예우를 조장하는 ‘법조계 카르텔 사조직’이라는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2015년 대한변협은 “민판연은 법관 순혈주의와 엘리트 주의의 폐단을 낳고 전관예우의 통로가 된다”며 공개 비판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법원행정처는 이를 ‘외부 공격’으로 규정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폐단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가 사법농단 사건입니다. 사법농단 사건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한상호 변호사의 관계가 문제됐는데, 한 변호사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 기업을 대리하던 김앤장 소속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민판연 회원이었고, 이들이 법정 바깥에서 만나 강제동원 사건 이야기를 나눈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습니다. 법관과 소송 일방 대리인이 만나 사건에 관해 대화할 수 있었던 연결고리에 민판연이 있었던 겁니다.

권 후보자가 지난 5년간 쓴 63건의 법률 의견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김앤장이 의뢰한 것입니다. 권 후보자는 김앤장에 30건의 법률 의견서를 작성해주고 9억4600만원(필요경비 공제 전)을 받았습니다. 다른 로펌이 법률 의견서를 의뢰한 사건은 국제중재가 대부분이지만 김앤장은 국내소송이 15건이나 됩니다.

권영준 대법관 후보자가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권영준 대법관 후보자가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권 후보자는 국회 서면답변서에서 “민판연은 순수한 학술단체”라며 “2010년부터 문호가 개방됐고 회원 명단도 공개하고 있으므로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사조직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 “일부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회원이 다소 많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법관이었던 회원이 퇴직 후 해당 로펌에 취업하게 됐다는 우연한 사정으로 인한 것”이라며 “전관예우 통로로 악용된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했습니다.

“법관이 무심코 받은 전화 한 통만으로도 변호사와 유착관계에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고,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까지 무너질 수 있다.” 2016년 현직 부장판사의 금품수수 등 법관 비리로 이어진 정운호 게이트가 불거졌을 때 대법원은 ‘법정 외 변론 금지’ 대책을 담은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만큼 엄격하게 재판의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조윤리를 연구해온 정형근 경희대 법전원 교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만약 권 후보자가 대법관으로 임명되면 대형 로펌은 노골적으로 향후 대법관으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는 교원을 상대로 각종 의견서 작성을 의뢰하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은 정부가 타파를 주장하고 있는 전형적인 이권 카르텔 형태라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주된 구호는 ‘카르텔 척결’인데, 십수억을 받고 수십 건의 법률 의견서를 써준 교수가 대법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법조 카르텔을 묵인·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게 정 교수의 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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