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대법관은 파수꾼” 오경미 대법관의 특별한 강연

①여성 대법관 20년, 아직도 여성이 부족하다

오경미 대법관이 말하는 대법원 다양화

“사회의 다양한 스펙트럼 가치 반영해야”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지난달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한수빈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지난달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한수빈 기자

오경미 대법관(55세)은 지난 8월20일 법원 내부에서 ‘특별한 강연’을 했다. 법원 내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가 주최한 법관 연수 강연이다. 오 대법관은 현재 3명인 여성 대법관 중 1명이다. 대법관 13명 중 권영준 대법관(53세) 다음으로 젊고, 사법연수원 기수(25기)는 권 대법관과 함께 가장 낮다. 2021년 9월 취임해 대법관 3년차인 오 대법관이 본 대법원은 어땠을까. 강연에서 그는 여성 대법관, 나아가 대법관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 대법관은 대법원을 ‘용광로’라고 표현했다.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은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여기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판결 내용이 달라진다. 대법관 13명이 모두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다퉈볼 필요도 없다. 반면 다양한 가치를 지향하는 대법관들이 서로의 생각을 두고 논쟁하고 시대의 흐름을 판결로 녹여낼 때 대법원은 용광로와 같아진다는 것이다.

오 대법관의 말이다. “정의는 획일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잖아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르기 때문에 굉장히 역동적인 개념이죠. 그 역동성을 구현하는 것이 결국 다양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치의 다양화를 통해서 그 안에서 치고받고 싸워서 결론을 내면 그게 어느 한 시점의 결론이 되겠죠. 하지만 그게 또 영원한 것은 아니죠. 계속 바뀌어가는 것일 수 있고, 그렇게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 어떤 가치의 역동성을 구현하려고 다양성이 이야기되는 것 같아요.”

오 대법관은 여성의 삶과 경험은 법관으로서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주로 여성이 피해자인 성범죄 같은 젠더 사건에서 더욱 그렇다. 대법원에 여성 대법관이 없다면 여성적 가치의 다양화와 그에 기반한 최소한의 토론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뜻이다.

“재판을 하면 할수록, 특히 성폭력 사건 같은 재판을 하면 평소 무척 존경하는 재판부 동료가 뜻밖의 입장을 보여줄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화들짝 놀라면서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가’라고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닐 때는 ‘그래, 역시 경험의 차이가 이런 것을 가져오는구나’라고 하는 거죠. 30년, 40년, 50년 동안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각각의 개별적 경험을 통해서 느끼는 공포와 분노가 있거든요. (그런 경험을) 제도적으로 어떻게 반영해야 될지, 그들의 권익을 법률의 해석에서 어떻게, 왜 실현해야 할지, 그런 절실함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법리가 절대적으로 더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여성적 가치에 대한 절실함이 있는지가 (남성과 여성이) 다른 것이죠.”

조재연·박정화 대법관이 지난 7월 퇴임하면서 낸 퇴임사는 대법원 안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조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대법원이 내리는 판결은 실정법률과 마찬가지로 국민들의 일상생활에서 행동 규범과 지침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대법원 판례의 변경은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박 대법관은 “대법원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이 올라온다. 그러기에 다양한 성장환경과 경험, 가치관을 가진 대법관들이 서로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사람과 삶을 향한 깊은 애정과 통찰로 사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사건에 맞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남성인 조 대법관은 법적 안정성을, 여성인 박 대법관은 대법관 다양화를 마지막 메시지로 남긴 것이다.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성의 삶·경험, 법관으로서의 판단에 영향”
대법원 소부에 여성 최소 1명은 확보돼야

오 대법관은 대법원에서 여성 대법관들이 여성적 시각에 입각한 ‘파수꾼’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2016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여성 살해 사건, 2018년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 젠더가 주요 사회이슈로 떠오를 때 법원이 제대로 판결하고 있는지 곱씹고 잘못된 판례에 이의제기한 게 주로 여성 대법관들이었다는 것이다.

오 대법관은 “설령 (성범죄로 기소된 피고인이) 무죄가 맞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그게 정말 맞는지, 요즘 하급심에는 어떤 경향이 있는지 한 번쯤 스크린하는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소부에 1명씩 있어야 된다”며 “소부에 여성 대법관이 1명씩 생긴 이후 그런 스크린 역할이 잘 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현재 여성 대법관이 3명이라 소부 3개에 1명씩 배치돼있다. 하지만 오는 12월 퇴임하는 민유숙 대법관 후임으로 여성이 임명되지 않으면 여성이 1명도 없는 소부가 생기게 된다.

여성 대법관들의 시선은 전원합의체 판결에도 반영된다.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기존 판례를 40년 만에 폐기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대표적인 예다. 남성 대법관 5명은 강제추행죄 성립요건 완화에 동의하면서도 보충의견을 통해 처벌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여성인 오 대법관과 민유숙 대법관, 남성인 김선수 대법관은 “(판례 변경은) 처벌범위를 부당하게 넓히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 사건 주심이자 여성인 노정희 대법관은 보충의견을 통해 성범죄를 규율하는 세계 주요 국가의 법률과 판례가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하던 데서 ‘동의 부재’를 기준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짚었다. 김명수 대법원의 마지막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오 대법관은 말했다. “대법관들이 취임할 때 진보건 보수건 20~30년간 소수자와 약자 보호를 말하지 않는 분이 없어요. ‘진정한 소수자와 약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소수자·약자이고, 소수자·약자는 구조적으로 피해자의 위치에 처한 경우가 많죠. 그런 점에서 피해자론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론이기도 해요. 바꾸지 않고 그냥 끝낼 수도 있지만 (여성 대법관은) 여성적 가치에 대한 절실함의 태도가 다른 것이고요. 기존 법리 안에서 또는 판례의 변경을 통해서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결국 대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인 것 같아요. 대법원의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우리 사회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치가 존재하고,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급적 유사하게 대법관 배치에 반영하려는 목적 아닐까요?”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이토록 XY한 대법원]의 XY는 남성의 성염색체를 말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 탄생한 지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대법원은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대법관 다양화와 관련한 더 많은 기사를 읽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로 들어오세요.
링크: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s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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