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의 거리두기] ‘기후위기’와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진 엄청난 양의 빗물은 기후변화에 관한 우리의 환상을 깨는 것처럼 보인다. 천천히 덥히는 물에 들어가 그 위험을 알지 못하다가 결국 끓어오른 물에 죽게 된 개구리처럼 우리는 그동안 기후변화의 심각한 위험을 깨닫지 못했던 것인가? 개구리가 끓는 물속에 들어가면 바로 뛰쳐나오듯이 우리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홍수와 가뭄이 극한적이라면 우리는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삶의 방식을 금방 포기했을까? 우리의 예측과 대비를 넘어서는 폭우를 ‘극한호우’라고 부르듯이 기후가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기후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산사태로 황폐해진 마을의 처참한 모습은 기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너무 많은 사망자와 실종자, 엄청난 규모의 피해, 그리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절망적인 모습은 기후위기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번 집중 호우는 여름철 여러 날에 걸쳐 지루하게 비가 내리는 전형적 장마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짧은 시간 좁은 지역에 강도 높게 쏟아지는 집중 호우는 장마에 익숙한 우리의 타성을 단숨에 날려 보냈다. 이런 집중 호우가 언제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진짜 위기다. 예측하기도 대비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만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물난리를 겪고 있는 동안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는 지옥 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중해 주변의 나라에서 수은주는 40도를 오르내리고, 그리스와 스페인은 설상가상으로 산불에 시달린다.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싼바오와 미국의 데스밸리 국립공원의 기온이 각각 52도와 53도를 찍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특정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예외적 현상이 이제는 지구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페르시아만의 기온은 65도까지 치솟아 인체가 견딜 수 있는 생존 한계선을 훌쩍 넘어섰다. 우리 인간은 연평균 기온이 29도 이하인 곳에서 가장 잘 사는데, 지구 전체가 더 더워지고 있으며, 인간이 거의 살 수 없는 지역이 늘어나고 있다.

기후위기가 되레 민주주의 위협

비가 내리면 극한호우가 되고, 날이 더워지면 극한폭염이 계속되는 위기가 우리를 위협한다. 물론 우리 인간은 극한 조건을 잘 알고, 잘 극복한다. 인간만큼 파괴적인 바람, 얼어붙는 추위, 치명적인 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동물은 지구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발전시킨 과학과 기술 덕택에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추우면 히터를 켠다. 좋은 난방과 비행기로 음식을 배달하면 사람들은 이제 남극 대륙의 극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에 대한 극복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들은 우리 인간에게도 생명과 생존의 ‘예외’이다. 이제까지 인간은 수많은 극한을 경험했지만, 대부분 예외적 상황이었다. 극한은 언제나 예외였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식량을 조달하고, 무역 활동을 하고, 정착할 수 있는 지대에서 거주했다. 그곳은 연평균 기온이 약 13도이거나 몬순 기후인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약 27도인 곳이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기온이 12.8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13도에서 27도 사이의 온도 범위가 대체로 적절한 인간 기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 기후 범위 밖이라고 해서 건강에 직접적으로 위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는 남반구 지역에서는 작업이 대부분 야외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구온난화는 생활 및 생존 조건의 악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현재 지구촌은 2.7도 온난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기온 0.5도만 올라도 피해 주민은 2배 늘어난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후변화의 지구적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눈으로 볼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중해와 중동 지역을 강타한 폭염보다 남부 지방에 내린 폭우가 훨씬 더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기후위기가 초래할 재난과 파국을 상상하는 게 쉽지 않은데, 기후위기를 대비하는 구체적 행위를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우리의 가족과 친지, 동포에 머무는 한 전 지구적 문제인 기후위기에 대한 공동대처는 그만큼 더 멀어진다는 점이다.

기후위기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된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정치와 민주주의다.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과 마찬가지로 기후위기로 고통받는 사람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정치의 과제라면, 자원을 분배할 때 기후위기와 같은 외부적 사건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이런 점에서 “국민 혈세는 재난으로 인한 국민 눈물을 닦아 드리는 데 적극 사용돼야 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말은 옳다.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논란이 된 까닭은 이권 카르텔에 대한 보조금과 수해 복구 재정을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기후위기가 건전한 민주적 정치를 요구하는데, 정치가 권력투쟁에 기후위기를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지 않을까? ‘누가 이권 카르텔인가?’ ‘이권 카르텔은 당연히 국민에게 돌아갈 지원금을 빼앗아가는가?’ ‘그 액수는 수해 복구와 피해 보존에 충분할 정도로 큰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의 관심을 기후위기의 문제에서 재난 보조금과 이권 카르텔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이권 카르텔’이라는 용어는 국민의 관심을 유인하는 ‘사운드 바이트’(Sound bite)이다. 물론 수해 복구는 조속히 이루어져야 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재난이 기후위기로 인한 것임에도 문제를 보조금 문제로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의 관심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미래에 대한 현재의 카르텔 우려

기후변화로 인한 천재지변 양상이 극단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우리는 여기에 맞는 재난 관리체계와 대응 방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인데, 기후위기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이번 천재지변에서 볼 수 있듯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기후재난은 절박하고 즉각적이다. 비상사태를 선언할 정도의 급박한 상황은 언제나 민주적 논의를 방해한다. 기후변화는 한 국가가 결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까닭에 국제적 협동이 필요한 것처럼,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내적으로도 다양한 행위자들의 연대와 협동이 필요하다. 기후위기에 대한 재난 관리체계가 주민과 전문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면, 민주적 논의는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기후위기는 이제까지 익숙했던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도 변화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는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압력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개입을 요청하는 상황이 많아질수록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권위주의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은 커진다. 특히 기후위기가 예외에서 일상으로 변하고, 기후 정책이 정치적 일상의 일부가 된 지금 정치는 더 이상 과거의 자유 민주주의 형태가 아니다. 예컨대 서구에서는 ‘마지막 세대’(Last Generation)라는 환경운동단체의 극단적인 시위가 우리의 미래에 대한 민주적 논의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시위를 범죄화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 세대의 자유와 안전을 위해 미래에 대한 논의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우리는 이제 미래 세대에게 어떤 삶의 터전을 물려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지속 가능성은 사실 미래 세대의 자유를 위해 현재 세대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제한은 시민들이 지속 가능한 생활환경을 만들기 위해 협동하는 민주주의의 진정한 목표이다. 우리가 미래의 관점에서 지금의 자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숙고한다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기후위기는 어느 정도 제한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미래에 대한 논의 없이 개발과 재난과 보전을 반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래 세대에 대한 현재 세대의 이권 카르텔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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