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G의, RBG가 만든 순간

윤기은 기자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 대법관 |TPX연합뉴스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 대법관 |TPX연합뉴스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 연방대법관은 평생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법원에 변론하고, 소신을 밝히고, 판결을 내려왔다. 긴즈버그가 변호사로 일하던 1970년대 미국의 법은 여성에게 부당했다. 임신한 여성을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는 주(州), 부부강간 기소는 불가능했던 주가 많았다. 변호사→항소법원 판사→대법관으로 이어지는 이력 내내 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을 법으로 설명해왔다.

긴즈버그는 ‘노토리어스(악명 높은) RBG’로도 불린다. 그가 대법원에서 “나는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에 감명받은 로스쿨 학생이 기득권에 투쟁하는 유명 래퍼 ‘노토리어스 BIG’에 빗대어 만든 별칭이다. ‘노토리어스 RBG’의 순간과 그가 만들어낸 순간을 모았다.

긴즈버그가 변론한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소송 대법원 판결문. |미 의회도서관

긴즈버그가 변론한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소송 대법원 판결문. |미 의회도서관

샤론 프론티에로는 결혼한 미 공군 소위였다. 하지만 기혼 동료들에게 주어지는 주택 수당이 샤론에겐 나오지 않았다.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샤론은 “기혼 여성 공군에게 주택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1973년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변호사 긴즈버그는 전원이 남성인 대법관 9명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의 관심분야는 가정과 자녀뿐이라 여긴다. 이런 차별의 결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제약받고 여성은 남성보다 늘 낮은 지위에 머문다. 지금 우리 요구는 1837년 사라 그림케와 같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형제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우라는 것이다’.” 샤론 프론티어는 소송에서 승소했다. 긴즈버그가 처음 대법원 변론을 맡은 건이었다.

1993년 7월20일 긴즈버그 당시 대법관 후보가 미 상원 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발언 중이다. 워싱턴|로이터연합뉴스

1993년 7월20일 긴즈버그 당시 대법관 후보가 미 상원 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발언 중이다. 워싱턴|로이터연합뉴스

1993년 대법관 후보로 지명됐을 때 긴즈버그는 상원 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공화당 행크 브라운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신중단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임신중단을 선택할 수 있는 경우에도 권리가 주어져야 하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고 소신을 드러냈다. “아이를 낳을 지는 여성이 자신을 위해서 결정할 문제다. 그 결정을 정부가 대신한다면 이는 여성을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질 수 있는 성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1993년 8월10일 긴즈버그가 백악관에서 대법관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1993년 8월10일 긴즈버그가 백악관에서 대법관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긴즈버그는 96대3으로 상원의원 인준에 통과해 1993년 8월10일 대법관에 취임했다. 긴즈버그가 윌리엄 렌퀴스트 당시 대법원장(사진 맨 오른쪽)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선서를 하고 있다. 그의 남편 마틴 긴즈버그가 증인으로 나서 성경책을 들고 있다. 맨 왼쪽에는 긴즈버그를 지명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선서를 지켜보고 있다.

버지니아 밀리터리 군사학교에서 2019년 졸업식을 거행하고 있다. |VMI 공식 트위터 계정

버지니아 밀리터리 군사학교에서 2019년 졸업식을 거행하고 있다. |VMI 공식 트위터 계정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버지니아 군사 대학(VMI)은 157년 동안 남학생만 받았다. VMI에 입학을 원하던 여성 한명이 ‘남성생도만 받는 것은 위법’이라며 소송에 나섰다. 1996년 미국 대 버지니아주 사건에서 긴즈버그는 이렇게 판결했다. “정부가 성별에 근거한 분류를 할 시에는 ‘매우 설득력있는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 생도 과정을 이수할 능력이 있는 여학생들은 입학을 희망할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 판결문을 근거로 여성의 동등한 기회를 제한하는 법률의 효력을 소멸할 것이다.” 1997년 VMI에는 첫 여성 생도들이 입학했다.

2009년 1월29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이 적힌 행정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로 서 있는 금발 여성이 레드베터다. 워싱턴|게티이미지

2009년 1월29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이 적힌 행정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로 서 있는 금발 여성이 레드베터다. 워싱턴|게티이미지

릴리 레드베터는 20여년 동안 ‘굿이어’라는 타이어 회사에서 감독관으로 근무했다. 1997년 그의 월급은 3727달러인 반면 가장 낮은 급여를 받는 남성 관리자의 월급은 4286달러였다. 레드베터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당시 대법원 재판부는 ‘차별은 인정하지만 소송 시기가 지났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긴즈버그는 소수 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교활한 임금차별로 피해자가 된 여성에 대해 몰이해하거나 무관심하다 …… 오늘날 공은 또다시 의회로 넘어갔다.”

2009년 미 상원의원 60%가 찬성해 성별과 인종으로 인한 임금 차별을 금지하는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행정명령 1호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법이 만들어지는 데에 긴즈버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2015년 긴즈버그가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교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워싱턴|PBS 화면 갈무리

2015년 긴즈버그가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교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워싱턴|PBS 화면 갈무리

“(정원이 9명인) 연방대법원 대법관 중 몇명이 여성이라면 만족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내 대답은 늘 같다. ‘9명’이다 …… 대법관 9명이 모두 남성일 때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긴즈버그는 여성 대법관이 9명이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말해왔다.

2018년 1월21일 긴즈버그는 미국 파크시티 선댄스영화제에서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제작자들과 사진을 찍었다. 긴즈버그를 제외하고 맨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레이스 먼덴할 편집자, 보니 그린버그 음악감독, 나딘 나투르 편집자, 미리암 커틀러 작곡가, 칼라 구티어레즈 영화 편집자, 줄리 코헨 감독, 벳시 웨스트 감독,  클라우디아 라쉬케. 파크시티|게티이미지

2018년 1월21일 긴즈버그는 미국 파크시티 선댄스영화제에서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제작자들과 사진을 찍었다. 긴즈버그를 제외하고 맨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레이스 먼덴할 편집자, 보니 그린버그 음악감독, 나딘 나투르 편집자, 미리암 커틀러 작곡가, 칼라 구티어레즈 영화 편집자, 줄리 코헨 감독, 벳시 웨스트 감독, 클라우디아 라쉬케. 파크시티|게티이미지

2018년, 전세계에서 미투 물결이 거세졌다. 긴즈버그는 독립국제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 참석해 자신도 대학생 시절 교수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여성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 침묵해왔지만, 지금은 법이 성희롱을 겪은 여성과 남성의 편이며, 이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2020년 9월20일 미국 워싱턴D.C.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긴즈버그의 임시 추도식에서 두 여성이 포옹하고 있다.  워싱턴|게티이미지

2020년 9월20일 미국 워싱턴D.C.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긴즈버그의 임시 추도식에서 두 여성이 포옹하고 있다. 워싱턴|게티이미지

2020년 9월18일 긴즈버그는 향년 87세로 생을 마감했다. 미 대법원 앞에는 수천명의 사람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고인은 9월25일 미 의회 의사당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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