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감 2022

임신부까지 야근시키는 ‘판교의 등대’···게임업계는 노동법 무법지대

조해람 기자

임신부 야근·초과근로에 임금체납까지 만연

취업규칙도 엉망인데 기업들은 “더 굴릴래”

류호정 의원 “문체부 장관, 노동자도 만나야”

2021년 9월 30일 판교테크노벨리 일대 모습. 권도현 기자

2021년 9월 30일 판교테크노벨리 일대 모습. 권도현 기자

‘K-콘텐츠’ 열풍의 주역인 게임업계에서 여전히 임신노동자 장시간 노동, 출근 전 강제노동 등 노동법 위반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악명 높은 ‘크런치 모드’를 가능하게 하는 탄력근로제 등 유연근무 관련 제도 역시 사용자가 법을 어기고 입맛대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했다. 고질적인 추가수당·퇴직금 등 임금체납도 꾸준히 일어났다.

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최근 5년간 주요 게임업체 근로감독 결과’를 보면, 노동부는 지난해 11월 엔씨소프트와 넷마블에 대해 근로감독을 벌여 총 11건의 노동관계법 위반사항을 적발했다. 엔씨소프트는 8건, 넷마블은 3건이 적발돼 시정지시를 받았다.

위반 대부분 ‘임금’과 ‘시간’···임신부 야근까지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엔씨소프트에서는 임신 노동자의 모성보호와 관련해 심각한 위반사항이 다수 적발됐다. 엔씨소프트는 임신한 직원에게 인가 없이 야간·휴일근로를 시키고 시간외근로를 시켜 시정지시를 받았다. 근로기준법 70조에 따르면 회사는 임신 노동자의 명시적인 청구와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가 없으면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의 시간 또는 휴일에 일을 시켜선 안 된다. 근로기준법 74조는 임신 노동자에게 시간외근로를 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또 산후 1년이 지나지 않은 직원에 대해 연장근로 한도를 위반(근로기준법 71조)하기도 했다.

쉬는 시간도 없이 과로를 시킨 점도 드러났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사용자는 1개월이 넘어가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적용받는 노동자에게 근무일과 근무일 사이 11시간 이상의 연속 휴식 시간을 줘야 하는데, 엔씨소프트는 이를 어겨 시정지시를 받았다. 반면 직원이 문제를 제기할 통로인 노사협의회는 없었고 고충처리위원도 선임되지 않았다. 넷마블에서는 퇴직자 퇴직금과 임금, 재직 직원 임금 일부를 지급하지 않은 점이 드러나 시정지시를 받았다.

경향신문 일러스트

경향신문 일러스트

게임업계의 노동관계법 위반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엔씨소프트와 넷마블 근로감독보다 1년 앞선 2020년 10월 스마일게이트 근로감독에서는 4건의 위반사항이 적발됐다. 스마일게이트는 연장근로 한도 위반으로 사법처리를, 근로계약 중요 서류 미보존으로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노동부는 2018년 6월 웹젠에서 1건, 같은 해 스마일게이트에서 8건, 2019년 9월 크래프톤에서 2건, 2020년 5월 펄어비스에서 5건의 노동관계법 위반을 적발하고 과태료 또는 시정지시를 내렸다. 주52시간을 초과해 일하면 근무시간 기록 자체를 입력하지 못하게 해 논란이 됐던 넥슨은 2018년 11월 근로감독에서는 위반사항이 발각되지 않았다.

적발사항은 대부분 임금과 노동시간에 관련된 위반이었다. 5년간 7개 업체에서 적발된 위반사항 31건 가운데 3분의1인 10건이 임금·휴일수당·퇴직금 미지급이었다. 9건은 연장근로한도위반·연속휴식시간 등 노동시간 관련 위반이었다. 노동시간 관련 위반 9건 중 4건은 임신 또는 산후 1년 미만 여성 노동자와 관련돼 있었다.

“직원은 시업 전에 출근해야 한다”···실화?

게임업체들은 장시간·고무줄 노동을 시킬 수 있도록 취업규칙을 짜 두고 있었다. 류 의원실이 주요 게임업체 12곳(넥슨, 엔씨소프트, 스마일게이트, 네오위즈, 넷마블, 위메이드, 웹젠, 카카오게임즈, 컴투스홀딩스, 크래프톤, 펄어비스, 엔에이치빅풋)의 취업규칙을 분석한 결과, 12곳 모두 선택적근로시간제·탄력근로제·재량근로제·간주시간근로제 등 유연근무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12곳 중 10곳은 2주 단위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면서 ‘노동자 범위’와 ‘유효기간’을 명시하지 않았다. 노동부의 행정해석 등을 보면 노동부는 “단순히 2주 이내의 탄력 근로제를 도입한다고만 명시해놓았다면 근로기준법 제51조 제1항의 ’취업규칙 등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적법하게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대상 노동자의 범위와 유효기간 등을 취업규칙에 명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한다. 사용자가 노동자의 범위와 기간을 정하지도 않은 채 멋대로 고무줄 노동을 시키는 것을 막자는 취지인데, 게임업계 대부분은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

2021년 9월 26일 판교 테크노밸리 일출. 권도현 기자

2021년 9월 26일 판교 테크노밸리 일출. 권도현 기자

12곳 중 8곳은 ‘출근 전 공짜노동’을 아예 규정으로 명시해 뒀다. 넥슨은 취업규칙에 “사원은 시업(업무 시작)시각 이전에 출근해 근무준비를 한다(제18조)”고 적었다. 카카오게임즈는 “사원은 시업시각 전에 출근하여 시업시각에 정상적인 근무를 개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퇴근은 종업시각 후 서류, 집기, 비품 등을 정리하여 소정 장소에 보관 후 행한다(제24조)”고 규정했다. 시업시간 전이라 해도 출근해서 업무를 준비하는 시간 역시 노동시간으로, 이 시간에 대한 임금 미지급은 임금체납으로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족 모르는 업체들, 정부에 “더 굴리게 해달라”

이처럼 게임업체들은 이미 장시간·고무줄 노동을 시킬 수 있는 조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부를 향해 ‘노동시간을 더 유연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6월17일 전병극 문체부 1차관과 게임업체(넥슨, 엔씨소프트, 스마일게이트, 캐럿게임즈, 아름게임즈) 간담회에서 업체들은 게임업계 업무 특성을 고려한 주52시간제와 유연근무제 보완을 요청했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고, 노동시간 규칙을 바꿀 때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하게 한 조건 등을 완화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장시간 노동을 더 쉽게, 더 오래 시킬 수 있도록 바꿔 달라는 것이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참석해 넥타이를 고쳐 메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참석해 넥타이를 고쳐 메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지난 7월1일 넥슨·네오위즈 등 12개 게임업체와의 간담회에서 주52시간제 유연 운영을 요구하는 업체들의 주문에 “유연근무제 확장은 필요하다”면서도 “판교의 등대, 크런치 모드 등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만큼 게임업계에서 선제적으로 대처해달라”고 했다.

정부가 기업의 애로사항만 청취하면서 게임업계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호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7년 ‘크런치 모드’로 과로사한 20대 게임개발자가 한 주에 95시간55분이나 일해 산재를 인정받는 등 과로 문제가 심각한데도 기업의 요구인 ‘유연근무 확장’에만 공감한다는 것이다. 류 의원은 지난 5일 열린 문체부 국정감사에서 박 장관을 향해 “게임을 만든다는 건 즐거움을 만드는 건데, 개발자들은 즐겁지 않다”며 “장관님은 현재 대기업의 목소리만 들으신 상태다. 장관이 게임업계 노동자를 만나서 장시간 노동 관행 개선, 노동자 건강권 보장, 산재 발생 예방을 위한 방안 등을 위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관계부처와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박 장관은 “소개해 달라. 알겠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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