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역 고통과 멍에, 한평생 망령처럼 따라다녔다

광주 | 유인경 선임기자

11년간 시위·재판… 日 기업 ‘근로정신대 손해배상 협의체’ 이끌어낸 양금덕 할머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란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4·19와 5·16, 광주항쟁….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어르신들은 누구나 이런 말씀을 한다.

평범한 삶을 지내온 이들의 삶이 한 권의 소설이라면, 양금덕 할머니(82)의 인생은 대하소설일 터다. 양 할머니는 소학교 6학년 때인 1944년 근로정신대로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에 끌려갔다. 월급 한 푼 못 받고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그런 할머니는 지난 14일, 미쓰비시중공업이 근로정신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협의체 구성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제노동 66년 만의 쾌거이자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피땀 어린 노력이 11년 만에 이뤄낸 결실이라고 다들 축제 분위기였지만 할머니는 담담했다. 지난해 10월5일부터 광주 미쓰비시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매일 정오 진행되는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해온 할머니는 66년 동안 참아온 울분에 비하면 삼복더위는 견딜 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인들에게 착취당하고, 귀국해선 군위안부로 오인받으면서 66년을 참고 살아온 양금덕 할머니.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 없는 일본이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방치한 정부나 모두 양 할머니를 울린 가해자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인들에게 착취당하고, 귀국해선 군위안부로 오인받으면서 66년을 참고 살아온 양금덕 할머니.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 없는 일본이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방치한 정부나 모두 양 할머니를 울린 가해자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무슨 말을 해도 (일본인이) 하도 무서운 사람들이라 못 믿겠어요. 협의체를 구성할 테니 불매운동이나 시위를 중단하라는데 완벽한 합의서를 써주기 전까지는 시위를 계속할 겁니다. 아유, 어디 한두 번 속았어야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어요.” 고통스러운 기억이 하나하나 마음에 바늘로 새겨진 듯 양 할머니는 연도와 날짜, 인명과 지명을 또렷하게 기억하며 사연들을 풀어놓았다. 할머니의 기억은 고향인 나주의 대정소학교 6학년 교실로 거슬러 올라갔다. “1944년 5월20일 수업시간에 일본인 교장선생이 헌병과 함께 교실에 들어왔어요. 벌벌 떠는 우리들에게 교장이 ‘일본에 가면 중학교도 보내주고 돌아올 땐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도 벌어올 수 있다. 가고 싶은 학생들은 손들라’고 했어요. 그때 급장인 저는 선발된 것만으로도 굉장히 자랑스러웠어요. 다들 가겠다고 손들었는데 키가 작거나 몸이 약한 애들은 안 뽑아줬거든요.”

중학 진학은 꿈도 못 꾸는 형편에 ‘일본 여학교 입학’에 ‘내 집 장만’은 황홀한 유혹이었다. 아버지 몰래 지원서에 도장을 찍고 큰언니에게만 일본 간다고 말한 뒤 집을 떠났다. 5월30일, 나주 대정소학교에서만 24명이 여수항에 모여 일본으로 향했다. 전남에서 141명, 충남에서 138명이 함께했다. 13~16세 소녀들이었다. 중학생으로는 근로 인원이 모자라 초등학생까지 데려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가려 해방 60년이 넘도록 그 존재조차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조선 근로정신대’의 시작이었다.

여수에서 밤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다시 열차를 타고 마지막에 내린 곳은 학교가 아닌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사. 소녀들에게 배정된 일은 시너나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아내고,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줄칼로 다듬는 것이었다. 시너의 강한 독성 때문에 두통을 앓고 페인트가루 때문에 눈이 시리고 아팠다. 한겨울에도 장갑조차 지급되지 않아 손등이 터지고, 찢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그치지 않았다. 병원 치료나 병가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일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기에, 다쳐도 다시 작업대에 서야 했다. 끼니라고 해야 푸석푸석한 ‘안남미’ 밥에 단무지, 된장국이 전부. 항상 허기가 졌다. 일본인들이 양동이에 버린 밥을 퍼 먹다가 “더러운 조센징!” 하며 발로 차이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줄을 설 때도 일본인들이 밀쳐내 10~15분씩 기다려야 했다. 할머니는 유독 구타도 많이 당했다. 다른 소녀들을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학교에 보내준다더니 왜 일만 시키느냐고 따졌더니 ‘일이 익숙해지면 학교에 보내준다’고 하더군요. 자꾸 따지니까 뺨까지 때렸어요. 화장실에 가서 늦게 온다고 야단치기에 일하는 도중에 오줌을 싸버렸죠. 화내는 일본인 감독에게 ‘일본인들이 나를 밀쳐내 용무를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직접 화장실에 데려가 제가 줄 서서 당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 뒤에야 일본인들에게 줄을 제대로 서라고 지시하더군요.”

하루 10시간 이상의 고된 작업도, 굶주림도, 매일 밤 계속되는 공습의 공포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밤에는 공습경보에 방공호로 대피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44년 12월7일 지진이 나고야 일대를 강타했을 땐 6명의 소녀가 건물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할머니도 건물더미에 깔렸고, 옆에 있던 동료 두 명이 죽었다.

강제노역 고통과 멍에, 한평생 망령처럼 따라다녔다

45년 8월15일. 여수 출신의 한국 아저씨가 ‘해방됐다’고 알려줬다. 해방의 의미를 몰라 물어보니 ‘전쟁을 안 하는 게 해방이다. 너희들이 울어야 집에 보내줄 테니 일본인들 앞에서 엉엉 울라’고 조언해줬다. 할머니가 또 대표로 나섰다. 숙소 앞 냇가에 가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집에 안 보내주면 빠져 죽겠다’고 울부짖었다. ‘밀린 임금은 고향집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두 달이 지난 10월21일, 근로정신대 소녀들은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18개월 만이었다. 이제 고통은 끝난 줄 알았는데 ‘근로정신대’ 후유증은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귀국 후에 학교나 군청에서 찾아와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저는 혹시 자료로 쓰일까 해서 일본으로 떠나는 날부터 도착하는 날까지 일기에 써뒀거든요. 그러곤 동네 사람들은 절 보면 ‘돈 많이 벌어왔느냐’ 물으며 실실 웃기만 해요. 나이가 차서 혼담이 들어오는데 절 보고선 맘에 든다며 ‘혼인날을 잡자’던 이들이 연락이 없어요. 알고 보니 제가 군 위안부 출신으로 알려진 거예요.”

할머니는 스물한 살 때 건축일을 하는 남자와 서둘러 결혼했다. 아들 둘을 낳고 살던 어느날, 술에 취한 남편이 “일본말 잘하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을 몇이나 상대했느냐”고 화를 내더니 집을 나갔다. 그러곤 10년쯤 지난 후 병에 걸려 아들 셋까지 데리고 돌아왔다. 병에 걸려 일을 못하자 새 아내가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애들 아버지라 함께 살았다. 막내딸을 낳은 지 2년 뒤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후 6명의 자식과 친정어머니, 큰언니네 조카들까지 11명의 생계를 책임졌다.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옛 광주역 앞에서 리어카 행상을 했다. 참기름부터 생선까지 팔아보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동네에서 제사 지내고 밖에 놔둔 제삿밥까지 가져다 먹여도, 11명의 배를 채우기는 힘들었다. 광주시에서 ‘훌륭한 어머니상’을 주기도 했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타고난 성실성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다렸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라는데 설마 어린 소녀들 임금을 착취할까 생각했다. 미쓰비시에서 고향으로 임금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믿었다. 50년이 지난 99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86년부터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이 있던 나고야의 양심적 시민들이 문제 해결에 나선 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10년 만인 지난해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에 억장이 무너졌다.

“일본 정부에 후생연금 탈퇴수당 지급을 청구했는데, 근로기록을 찾는다며 10년을 질질 끌더니 ‘44년 10월부터 11개월만 후생연금에 가입한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탈퇴수당으로 99엔을 산정한 거예요. 당시 황소 한 마리 값이 50엔 정도였으니, 황소 두 마리가 요즘 라면 한 봉지 값으로 변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일본에 가 후생성 차관 앞에서 99엔 동전을 던지며 ‘마트에 가보니 이 돈으론 껌밖에 살 게 없더라. 이 돈으로 당신 자식들에겐 뭘 사줄 수 있느냐’고 따졌죠.

더욱 서운한 것은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냉담한 시선이었다. 팔순 노인들이 10년간 일본을 오가며 재판하고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에 시위를 해도 정치권은 물론 자치단체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이 힘이 되어줬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어 10년을 기다려줬고, 덕분에 미쓰비시로부터 ‘협의체를 구성해 해결하겠다’는 성과를 얻어냈다. “모두 시민들 덕분이에요. 저는 시민의 힘을 믿습니다. 그래서 광주항쟁 때는 이웃 어머니들과 함께 도시락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 5년 전부터는 동네 노인정에서 밥짓기 자원봉사를 해요. 요즘 거리에 가면 시민들이 힘내라고 격려도 해주고 영양제도 사줍니다. 얼마나 보상받을지 모르지만, 저를 도와준 시민단체 분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싶어요.”

비가 새고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조그만 집에 50년째 살면서도 할머니는 요즘 행복하다. 그는 이제 유명인사가 되어 금호타이어 같은 기업체나 단체에 강의도 다닌다. “요즘 왜 그리 자살하는 이들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너무 유약하고 쉽게 좌절하는 것 같아요. 강의하러 가서는 ‘저는 죽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더라. 전 66년을 기다려서 보상을 받는데 여러분이 몇 년도 못 기다리면 안된다’고 희망과 인내의 힘을 강조합니다. 다들 희망을 가지세요.”

■ 전범기업의 양심 깨운한·일 시민들의 힘

일제 강점기 일본 기업의 강제 노무동원은 확인된 것만 6만3500여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인을 노역에 동원했던 기업장은 모두 2600여곳에 달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 중 어느 한 곳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도 없었다. 지난 14일 미쓰비시가 근로정신대 손해배상 문제에 대해 재협상에 나설 뜻을 밝힌 것은 일본 기업 중 최초여서 의미가 크다.

‘조선여자 근로정신대’는 1944년 일본이 군용 경비행기를 제작하던 나고야의 미쓰비시 군수공장에서 강제노동을 시킨 조선인 소녀들을 뜻한다. 소녀들은 하루 10시간씩 강제노동을 하고도 단 한 푼의 급여도 받지 못했다. 회사 측은 ‘급여는 저축했다가 나중에 조선에 돌아갈 때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이 약속은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근로정신대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일본의 양심적 시민 1000여명으로 구성된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지원단 덕분이다. 88년 나고야 시민 몇몇이 강제노동하다 도난카이 지진으로 숨진 조선인 소녀 6명에 대한 위령비를 세웠다. 당시 기숙사 사감의 아들이 이 기사를 보고 보관 중인 사진첩을 공개한 뒤 본격적인 지원단을 결성하고 근로정신대의 실체 알리기에 나섰다. 10여년이 흐른 99년 양금덕 할머니 등 피해자 8명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뜻있는 일본 시민들과 함께였다. 2005년 3월 나고야 지방재판소, 2007년 나고야 고등재판소, 2008년 11월 도쿄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기각판결을 받았지만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지원회는 11년 동안 한결같이 원고들을 도왔다. 일본 내각과 미쓰비시, 의원회관 등을 찾아가 성토하고 지난달 18일에는 일제 강점 상황과 관련한 일본 내 진상규명 네트워크도 결성했다.

지난해 3월 이국언씨(42) 주도로 광주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만들어졌다. 2004년부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이씨는 나고야 시민들이 99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직장도 그만두고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리고 광주지역 후원자들과 시민모임을 결성했다. 시민모임은 1인시위와 소송지원회 회원 초청 등 광주-나고야 간 평화의 길을 개척했다. 이씨는 “우리 정부는 4조원대에 이르는 징용피해자들의 미지불 임금이 일본에서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기업의 손해배상 이전에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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