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 담긴 한반도 ‘희로애락’

정희완 기자

‘남산’에는 한반도의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사회 변화에 따른 온갖 풍파를 겪었습니다. 조선 건국부터 일제 강점기, 유신 시대,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남산은 모든 과정을 묵묵히 목도하고 경험했습니다.

8월22일은 ‘한일합방조약’이 이뤄진 지 105년째 되는 날입니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죠. 이 치욕의 역사는 남산에 있는 조선 통감부(조선총독부) 관저에서 시작됐습니다.

한반도의 ‘희로애락’이 남산에 담겨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산의 이야기를 담은 ‘남산의 힘’을 11월1일까지 전시합니다.

남산, 2010, 김봄,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남산, 2010, 김봄,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수호 산’

1392년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이래 남산은 한민족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온 산입니다. 당시 남산은 ‘목멱산’으로 불렸습니다. 남산은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복을 구하는 국가의 수호 산이었죠. 이 때문에 초기 남산은 백성의 출입을 제한하고 벌채를 금지하는 등 철저한 규제 아래 보호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조의 기틀이 점차 자리를 잡으며 풍류를 즐기려는 백성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습니다. 계곡마다 흐르는 맑은 물과 도성과 한강이 굽어보이는 풍경, 사시사철 푸르른 남산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흥취를 일으켰습니다. 문인 사대부들에게는 정자를 짓고 우정을 나누는 풍류의 공간이, 백성들에게는 씨름과 꽃구경을 하는 놀이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정선, 백납병풍의 목멱산,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정선의 회화 23점을 모아놓은 백납병풍 중 첫 번째 화폭에 남산의 모습이 담겨있다. 구름에 둘러싸인 남산으로, 정상에 소나무를 표현한 것이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정선, 백납병풍의 목멱산,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정선의 회화 23점을 모아놓은 백납병풍 중 첫 번째 화폭에 남산의 모습이 담겨있다. 구름에 둘러싸인 남산으로, 정상에 소나무를 표현한 것이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푸근하게 올라온 남산은 한양의 남산은 도성과 봉수, 각종 군사기관 등이 입지해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천도 직후 1396년부터 조선은 18.6km에 달하는 장대한 도성을 축조해 한양의 울타리를 완성하는데요. 남산의 도성은 남쪽에서 들어오는 외적으로부터 한양을 지키는 방패였습니다. 남산의 봉수는 전국에서 보내오는 봉수의 신호를 마지막으로 취합해 대궐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백성들은 매일 저녁 피어오르는 봉수의 횃불을 보고 안심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고 하네요.

1768년(영조 44) 9월 의금부 도사都事 10명이 조직한 금오계金吾契 모임을 정리한 『금오계첩金吾契帖』 중 김윤겸이 그린 삽화다. 남산 북쪽 골짜기 천우각 주변 실경을 표현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768년(영조 44) 9월 의금부 도사都事 10명이 조직한 금오계金吾契 모임을 정리한 『금오계첩金吾契帖』 중 김윤겸이 그린 삽화다. 남산 북쪽 골짜기 천우각 주변 실경을 표현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남소영에서 벌어진 연회장면을 묘사한 김홍도의 그림이다. 남소영은 장충동과 한남동을 잇는 고개 마루턱의 남소문南小門 근처에 있었던 어영청御營廳의 분영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남소영에서 벌어진 연회장면을 묘사한 김홍도의 그림이다. 남소영은 장충동과 한남동을 잇는 고개 마루턱의 남소문南小門 근처에 있었던 어영청御營廳의 분영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고종은 1900년 군사시설인 남소영 터에 조선 최초의 ‘국립묘지’ 장충단을 설립합니다. 대한제국 수립 후 고종은 여러 개혁을 단행했는데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의 의열함을 기림으로써 군대의 사기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자주적 항일 의지는 십년도 채 되지 않아 일제에 의해 좌절됐고 그 자리는 일본에 내주게 됐습니다.

■ 식민통치의 현장

남산은 일본의 침략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일본은 남산을 기점으로 토지를 침탈해 거점으로 삼아 서울의 중심부로, 또 남쪽의 신시가지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남산 북쪽 기슭 애장동 일대에는 일본인 거류지와 식민지배의 핵심 통치기구인 조선 통감부(조선총독부), 헌병대 등을 설치합니다. 남산 산록 중 가장 눈에 잘 띄는 회현 자락에는 조선신궁을 세워 조선인을 정신적으로 옭아맸습니다. 남산은 빼어난 경승지이자 경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반대로 경성 어디에서도 보이는 랜드마크입니다. 바로 이 남산에 일본은 식민권력의 상징물을 이식해 여기에 새겨진 조선인들의 기억을 해체하고자 했습니다.

남산 왜성대(현 예장동)의 통감부청사는 이후 총독부청사로 바뀌어 1926년 경복궁 신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식민통치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남산 왜성대(현 예장동)의 통감부청사는 이후 총독부청사로 바뀌어 1926년 경복궁 신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식민통치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그들’의 전원

조선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유람의 공간이었던 남산은 일본인들의 공원으로 전락합니다. 일제는 남산 주변의 거류지 확보 후 왜성대공원, 한양공원, 장충단공원 즉 남산의 북, 서, 동쪽에 공원의 설치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침탈했습니다. 일본은 고종이 충군의 제사 목적으로 설립한 장충단 역시 공원으로 개조해 본래 장충단이 가진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데요. 일부 일본인들을 위해 남산 남록의 조망이 좋은 곳에 고급주택을 짓기 위해 신당에서 삼각지에 이르는 남산주회도로가 부설되기도 했습니다. 남산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본의 전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한양공원 개원식 사진(조선신궁기 수록),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일본인 거류민단은 토지를 영구 무상대여하여 공원을 개원하였다. 개원식 기념사진에 찍혀 있는 ‘한양공원漢陽公園’ 제명은 공원 개원식 때 고종이 칙사를 보내 축하하며 함께 보낸 것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한양공원 개원식 사진(조선신궁기 수록),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일본인 거류민단은 토지를 영구 무상대여하여 공원을 개원하였다. 개원식 기념사진에 찍혀 있는 ‘한양공원漢陽公園’ 제명은 공원 개원식 때 고종이 칙사를 보내 축하하며 함께 보낸 것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남산 한양공원 = 일본인 거류민단은 토지를 영구 무상대여하여 공원을 개원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남산 한양공원 = 일본인 거류민단은 토지를 영구 무상대여하여 공원을 개원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공원’은 근대 문물과 함께 유입된 개념으로, 1897년 세워진 왜성대공원을 시작으로 남산에는 한양공원, 남산공원, 장충단공원 등이 세워졌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공원’은 근대 문물과 함께 유입된 개념으로, 1897년 세워진 왜성대공원을 시작으로 남산에는 한양공원, 남산공원, 장충단공원 등이 세워졌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고종이 충군을 기려 만든 장충단의 운명은 기구했습니다. 1919년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전락하더니 1932년에는 조선 식민지화의 일등공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 박문사가 들어선 것입니다. 일제는 조선의 항일 의지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듯 조선 궁궐과 기념 건물들을 해체해 그 부재를 건립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박문사 = 박문사는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로, 경복궁의 선원전, 남별궁의 석고전, 경희궁의 흥화문 등 조선 왕실 건물을 옮겨다 지어 식민지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박문사 = 박문사는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로, 경복궁의 선원전, 남별궁의 석고전, 경희궁의 흥화문 등 조선 왕실 건물을 옮겨다 지어 식민지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박문사 = 박문사는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로, 경복궁의 선원전, 남별궁의 석고전, 경희궁의 흥화문 등 조선 왕실 건물을 옮겨다 지어 식민지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박문사 = 박문사는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로, 경복궁의 선원전, 남별궁의 석고전, 경희궁의 흥화문 등 조선 왕실 건물을 옮겨다 지어 식민지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황국신민서사의 언덕

일본의 강제 병합 후 남산은 일본의 국교인 신도에 점령됐습니다. 일본은 대만, 사할린, 만주 등 식민지마다 신사를 건립해 천황숭배 사상을 주입했는데요. 1898년 일본 거류민들은 왜성대공원에 거류민들의 신사인 남산대신궁(후에 ‘경성신사’)을 창건합니다. 1925년에는 한양공원 부지에 신사의 총본산인 조선신궁을 설립하고요. 조선신궁은 일왕가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와 1912년 죽은 메이지 일왕을 기린 곳으로 서울 어느 지역에서나 잘 보이는 능선에 압도적인 규모로 지어 조선인의 정신과 일상을 지배했습니다. 일본은 이에 그치지 않고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하고 개인 사당으로 격하했습니다.

천황의 메이지신궁 참배 광경 그림,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히로히토 천황의 메이지신궁 참배 그림이다. 메이지신궁은 메이지 천황과 그 황후를 신으로 모시는 곳이다. 1925년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도 일본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도록 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천황의 메이지신궁 참배 광경 그림,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히로히토 천황의 메이지신궁 참배 그림이다. 메이지신궁은 메이지 천황과 그 황후를 신으로 모시는 곳이다. 1925년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도 일본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도록 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본은 어린 학생들까지도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했습니다. 1939년 조선신궁 입구에 황국신민서사지주를 설치했습니다. 또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아침마다 일본 천황을 향해 절을 하게 하는 등 조선인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고자 했습니다.

남산 중턱에 자리잡은 조선신궁은 경성 시내 어디에서든 선명하게 보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남산 중턱에 자리잡은 조선신궁은 경성 시내 어디에서든 선명하게 보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총동원 애국부인회 활동 그림엽서,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가열되면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민들을 전쟁체제에 동원하였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조선신궁과 황국신민의 서사는 동원을 위한 선전에 자주 사용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총동원 애국부인회 활동 그림엽서,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가열되면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민들을 전쟁체제에 동원하였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조선신궁과 황국신민의 서사는 동원을 위한 선전에 자주 사용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총동원 애국부인회 활동 그림엽서,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가열되면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민들을 전쟁체제에 동원하였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조선신궁과 황국신민의 서사는 동원을 위한 선전에 자주 사용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총동원 애국부인회 활동 그림엽서,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가열되면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민들을 전쟁체제에 동원하였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조선신궁과 황국신민의 서사는 동원을 위한 선전에 자주 사용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분단과 남산

해방과 함께 강요된 분단체제 아래서 남산은 통일된 나라의 상징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하기까지 좌·우로 나뉘어 치열하게 전개된 이념투쟁 속에서 수도 서울의 공간 역시 좌·우익 세력들의 각축장이 됐습니다. 해방에서 한국전쟁 이후 혼란기 동안 일본인이 떠나간 남산 일대의 귀속재산들은 무분별한 잠식과 점유의 대상이 됐는데요.

외인아파트  사진, 서울시 = 1972년 완공한 남산외인아파트는 외국인과 미8군의 수요에 따라 정부에서 공급한 것으로, 남산기슭에 있어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외인아파트 사진, 서울시 = 1972년 완공한 남산외인아파트는 외국인과 미8군의 수요에 따라 정부에서 공급한 것으로, 남산기슭에 있어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미군정기의 혼란스러운 적산처리 과정을 틈타 많은 사람들이 무단으로 점유했고 학교 등은 천막교사를 세워놓아 공원을 훼손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행위를 방치하거나 묵인했고 조건부로 가건축을 허용하는가 하면 공원용지를 변경하는 특혜를 주기까지 했습니다.

장충동 일대에 자유센터의 숙소로 건축돼 한국관광공사에 매각된 타워호텔이 민간인에 매각돼 개방됐습니다. 외국 귀빈의 숙소였던 영빈관이 삼성그룹의 자회사에 불하돼 호텔신라로 개관했습니다. 한편 남산의 서북쪽 아래에는 힐튼호텔, 동남쪽 기슭 한남동에는 하얏트호텔이 건설되면서 남산은 그야말로 ‘호텔 공화국’이 됐습니다.

1994년 11월20일 외인아파트 폭파 직전 모습, 서울시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94년 11월20일 외인아파트 폭파 직전 모습, 서울시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유신의 방패

서울은 거대 도시가 되면서 남산은 콘크리트 바다 한가운데 푸른 섬이 됐습니다. 남산은 그 속에서 근대화를 위한 국민교육의 장으로 재편됩니다. ‘국시’를 구현하는 거대한 반공교육장 자유센터가 산자락에 들어섰고, 산마루에는 ‘애국 애족’ 정신을 고취하는 동상들과 ‘민족문화의 요람’ 국립극장이 들어섭니다. 산 아래에는 국가와 정권 수호의 방패, 중앙정보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 잡습니다.

보람찬 내일 = 문화공보부에서 발행한 10월 유신의 당위성과 미래상에 대해 홍보하는 유인물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보람찬 내일 = 문화공보부에서 발행한 10월 유신의 당위성과 미래상에 대해 홍보하는 유인물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정리뉴스]남산에 담긴 한반도 ‘희로애락’
서울타워 전망권 = 1975년 종합전파탑으로 완공된 서울타워는 1980년에 이르러 일반에게 공개되어 관광명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타워 전망권 = 1975년 종합전파탑으로 완공된 서울타워는 1980년에 이르러 일반에게 공개되어 관광명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돌아온 남산

1990년대 남산은 ‘이념’의 옷을 벗고 ‘자연’ ‘사람’ ‘역사’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남산을 훼손했던 잠식시설들이 철거됐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전통과 문화,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됩니다. 1991년 수방사가 남태령으로 이전했고 4년 뒤 안기부는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합니다. 외인아파트는 1994년 11월20일 단 15초 만에 굉음과 함께 철거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발과 성장제일의 논리가 무너진 것입니다. 떠나간 수방사 자리에는 전통문화동네 조성계획에 따라 남산골 한옥마을이, 외인아파트 자리에는 남산 야외식물원과 야생화공원이 조성됩니다.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으로 남산에 있던 잠식시설 총 89동이 사라진 것입니다.

외인아파트 철거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사 제공 =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남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외인아파트를 1994년에 폭파 철거하였다.

외인아파트 철거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사 제공 =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남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외인아파트를 1994년에 폭파 철거하였다.

안기부 청사 철거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사 제공 =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안기부 청사 제1별관이 폭파 철거되었다. 안기부 청사를 철거한 것이나 공원용도 외 다른 용도로 사용한 사실은 역사 기억 지우기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안기부 청사 철거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사 제공 =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안기부 청사 제1별관이 폭파 철거되었다. 안기부 청사를 철거한 것이나 공원용도 외 다른 용도로 사용한 사실은 역사 기억 지우기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 일상이 된 남산

오늘날 남산은 시민들 삶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빌딩숲’ 속에서 남산의 짙푸른 녹음이 위안을 줍니다. 2000년대 이후 남산에 대한 다양한 요구가 쏟아집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집단이 참여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도 하지만 모두 진지하게 가장 남산다움을 고민하며 그 방향을 모색합니다. 남산타워의 야경과 굳은 사랑을 약속하는 빼곡한 열쇠 등 시민들의 추억이 숨쉬고 있는 사진입니다.

시민 공모 사진, 김현지

시민 공모 사진, 김현지

김현지씨의 ‘27년째 나는 아직도 무거운 딸’이라는 제목의 사진입니다.

“남산에서 장충동으로 넘어가는 길, 1990년 / 걸음이 늦는 나를 목마 태우고 남산을 오르느라 힘든 아빠의 오징어까지 달라고 칭얼대는 나의 모습. / 무거워서 힘들 텐데도 웃으며 오징어를 주는 우리아빠. / 사회인이 되어서도 아빠에게 매번 달라고만 칭얼대는 나. / 언제쯤 아빠에게 가벼운 딸이 될 수 있을까.”

시민 공모 사진, 문청야

시민 공모 사진, 문청야

시민 공모 사진, 윤성일

시민 공모 사진, 윤성일

시민 공모 사진, 고영훈

시민 공모 사진, 고영훈

시민 공모 사진, 김재은

시민 공모 사진, 김재은

김재은씨의 ‘젊은 날의 초상’입니다. 1960년 무렵 남산 팔각정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내년이면 칠순을 바라보시는 친정엄마의 20대 시절 사진입니다. 엄마와 아버지 두 분은 맞선으로 만나서 결혼에 골인하셨는데, 그 성공적인 역할을 한 사진이 바로 맞선보기 전 아버지께 보냈던 남산 팔각정 아래서 담은 이 젊은 시절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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