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사 유족들이 보는 ‘노동시간 유연화’
“우리 아이가 힘들다고 했을 때 왜 빨리 그만두라고 하지 못했을까…. 저희가 더 잘사는 부모였다면 아이가 일을 안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제가 부자가 아니고 힘이 없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엄마는 아들이 죽기 전 얼마나 일했는지 몰랐다. ‘과로사’라는 말도 모르고 살았다.
2020년 10월12일, 대학 졸업 후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야간노동을 하던 장덕준씨(27)는 귀가 후 샤워를 하러 들어간 욕실에서 쓰러져 숨졌다. 장씨가 한참 나오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문을 열고 숨진 그를 발견했다.
지병도 없고 술·담배도 안 하며, 태권도 4단 단증을 보유한 건강한 아들이었다. 어머니 박미숙씨는 더 빨리 발견하지 못한 가족의 책임인 줄 알고 자책하기만 했다.
박씨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장례식장에서였다. 장씨의 직장 동료들이 ‘장씨가 가슴을 움켜쥐고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해 줬다. 누군가 ‘과로사인 것 같다’고 했다. 박씨는 과로사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알았다. 박씨는 아들이 얼마나 일했는지 알아봤다.
장씨의 노동시간은 충격적일 만큼 길었다. 아들 장씨는 숨지기 전 1주 동안 62시간10분, 2주~12주 전에는 주당 평균 58시간18분 일했다. 근로복지공단은 2021년 2월 장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에 의한 사망’으로 판정했다.
과로로 아들을 잃은 박씨에게 정부의 ‘주 69시간’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은 이해할 수 없는 정책이다. 박씨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과로사 유가족·전문가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장시간 노동이 건강한 20대에게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아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확인 시켜 줬다”며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말했는데 왜 시간을 늘리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제 젊은 친구들에게 열심히 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며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바라나. 자기 자식의 일이라면 이럴 수 있을지 되묻고 싶다”고 했다.
과로사로 남편 최완순씨를 잃은 김예숙씨도 정부의 개편안을 납득하기 어렵다. 전선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최씨는 2교대로 주말도 없이 주간 11시간, 야간 14시간을 일했다. 전선의 ‘길이’를 기준으로 일이 내려오는데, 기계를 멈추면 불량이 나는 탓에 한 번 일을 받으면 끝날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
남편이 토요일 오전에 출근했다가 일요일 오후 8시에 퇴근했을 때 김씨는 폭발했다. “너무 심하게 일을 시키니까 엄청 속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무슨 일을 그따위로 시키냐고 얘기를 했죠. 그랬더니 남편은 내가 하고 싶은 시간만큼 일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했어요.”
김씨는 “나는 나이도 많고 노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것도 아니지만, 경험상 노동시간을 풀어주면 남편의 회사 같은 업체들에는 ‘마음 놓고 시켜도 된다’는 허락이 되는 것 아닌가”라며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라니,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건가”라고 했다.
장민순씨의 동생은 인터넷 강의업체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다 과로와 직장갑질에 2018년 1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장씨는 “당시 동생은 월 연장근로 69시간과 야간근로시간 29시간을 미리 약정한 포괄임금제 계약을 맺었다”며 “주 52시간 상한제에서도 과로사가 속출하는데, 연장노동시간 제한을 늘리는 게 어떻게 노동자의 휴식권 보장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간담회에 함께한 전문가들도 정부의 개편안이 건강권·휴식권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소속 김형렬 가톨릭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장시간 노동이 과로사를 일으키고 정신건강에 나쁘다는 부분은 너무 확고하게 잘 알려진 사실이며, 정부 개편안은 노동시간의 길이만큼 ‘불규칙 노동’도 문제”라며 “불규칙 노동을 하는 사람은 같은 시간 규칙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신체와 정신 건강 위험이 매우 커진다”고 했다. 한국이 야간노동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는 점도 문제라고 했다.
김 교수는 “월~연 단위 유연화를 하는 국가 대부분이 일~주 단위로 노동시간 상한을 두고 있고, 그 상한도 52시간보다 훨씬 짧다”며 “연장노동시간 단위를 유연화하더라도 주 48시간을 넘지 않아야 하고, 하루 단위 규제도 중요하다”고 했다.
권영국 변호사는 “정부는 선택권을 준다고 하지만 노동자의 선택권이 아니라 사용자의 재량권일 뿐”이라며 “그마저도 더 장시간 일하게 하는 선택권이지 더 짧게 일하겠다는 선택권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