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기획

냉전, 신냉전, 다음은 n개의 냉전…미·중 패권을 넘어 ‘다중경쟁’

이윤정 기자

다가오는 ‘다극성’ 시대…국제질서 불확실성 커진다

트럼프 자국 우선주의·바이든 체리피킹 외교로 미 영향력 퇴조
‘팍스 시니카’ 꿈꾸던 중국은 경제 부진·인권 탄압 문제로 홍역
탈세계화 경향 속 유엔 등 다자기구 힘 잃고 인도 등 신흥국 부상
단기적 이해 따른 느슨한 동맹 대세…군비 경쟁·핵 확산 등 우려

[창간 기획] 냉전, 신냉전, 다음은 n개의 냉전…미·중 패권을 넘어 ‘다중경쟁’

“세계화의 부식을 막는 것은 이미 어려워졌다.”

미국 피터슨경제연구소의 애덤 포센 소장은 지난 3월 외교전문매체 포린어페어 기고문에서 탈세계화를 진단하며 “2020년대는 세계가 점차 더 블록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포스트 팬데믹 이후 세계 각국 정상들이 다시 얼굴을 맞댔지만, 정치·경제·기후 이슈 전반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다 함께 힘을 모으려는 움직임은 주춤해진 대신 ‘끼리끼리’ 손을 잡는 움직임은 더 활발해졌다. 미국은 한·미·일 협력, 오커스(미국·영국·호주의 안보 동맹),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안보협의체) 등을 통해 군사·정치적 소규모 동맹을 강화했다. 반면 중국은 미국과 주요 7개국(G7) 동맹에 대항해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를 확대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는 이란, 중국, 북한 등과 밀착하고 있다.

미·중이 세계 경제 패권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사이, 신흥국들은 힘을 키우며 스윙스테이트(경합국가)로 떠올랐다. 세계 무대에서 절대강자의 지위가 약해지면서 다중 권력 경쟁 시대가 도래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날,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미국과 소련, 단 두 승자만 남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버나드 쇼의 예상은 적중했지만, 30여년만 지속됐다.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미국뿐이었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은 1강 체제를 강화하며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 패권)’를 굳히는 듯 보였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초강대국 미국의 힘에 의해 세계 평화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 또한 저물고 있다고 진단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몰락을 부추겼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란 슬로건을 내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동맹국과도 각을 세웠다. ‘세계의 경찰’을 자임해왔던 미국이 분쟁을 타협하고 평화 협상 카드를 제안하는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 도덕적 리더로서의 가치를 내팽개치고 ‘불량배’ 국가로 전락했다”고 꼬집기도 했다.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 시대가 열리며 ‘미국의 귀환’을 외쳤지만, 세계가 기대하던 미국은 아니었다. 바이든 정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 등을 속속 내놓으며 보호주의를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바이든 정부는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다자주의에 앞장서기보다는, 중국 견제에 필요한 동맹국만 골라 집중 관리하고 있다. 지난달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리는 인도네시아를 건너뛰고 바로 베트남으로 향한 것도 바이든식 ‘체리피킹 외교’의 일면이다. 비동맹주의를 고수하는 인도네시아는 미·중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을 가능성이 큰 반면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는 베트남을 포섭하면 중국 포위망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동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빼는 등 복잡한 지역 문제에 엮이는 대신 사우디아라비아 등 역내 국가를 하나씩 공략하며 돈과 에너지를 아끼고 있다.

중국, ‘잃어버린 30년’ 맞이하나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틈을 타 중국은 ‘팍스 시니카’(중국이 지배하는 세계질서)를 꿈꿨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 중심의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 일본 중심의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대안으로 각각 베이징과 상하이에 본부를 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신개발은행(NDB)을 만들고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했다.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을 육상과 해상으로 연결해 하나의 거대 경제권으로 묶겠다는 구상이다.

올해 ‘일대일로’는 10년을 맞이했다. 중국은 그간 약 8000억달러(약 1080조원)를 150여개국에 투자했지만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앞세워 개도국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뒤 빚을 갚지 못하면 항만 등 기간시설 운영권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채무의 덫’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스리랑카, 잠비아, 우간다 등은 중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가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졌거나 경제위기에 처했다. 이들 나라로부터 투자액을 반환받지 못하면 중국 또한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중국 내수 경제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 부동산 침체에 따른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향후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30년’을 능가하는 수준의 경제난을 겪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인구절벽 위기가 이 같은 우려를 부채질한다. 지난해 중국의 합계출산율은 1.09명으로, 대표적 고령화 국가인 일본(1.26명)보다 낮은 수준이다. 청년 실업률도 심각한 수준이다. 올 6월 청년(16~24세) 실업률이 21.3%로 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자 중국은 아예 지난 7월부터 청년 실업률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각종 인권 탄압 문제도 중국의 부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지난해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신장자치구 인권 실태 보고서에서 중국의 “심각한 인권침해”를 지적하며 위구르족 무슬림과 기타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의 탄압에 대해 비판했다. 중국은 소수민족뿐 아니라 홍콩의 민주화운동, 중국 내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 시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끼리끼리…‘소(小)다자주의’ 대세

이 같은 G2의 침체는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운 탈세계화 현상을 부추겼다. 여기에 코로나19 대유행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환점을 앞당겼다고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지적했다. 공급망 리스크가 현실화하면서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들은 보건 위기와 경제 위협을 동시에 맞닥뜨렸다. 미국·서방 중심의 자유주의 진영과 중국·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 진영의 대결구도도 심화됐다.

인도·태평양 지역에 있는 미국의 동맹들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 군사·정치적 소규모 동맹으로 더욱 촘촘한 그물망을 짜고 있다. 최근 한·미·일 협력체제가 새로 가동되기 시작했고, 미국·영국·호주는 오커스로, 미국·일본·호주·인도는 쿼드로 묶여 있다. 여기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글로벌 파트너국인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가 아시아·태평양 파트너 4개국(AP4) 협력으로 손을 잡았다.

반면 중국은 미국과 서방 주도의 G7에 대항하기 위해 신흥국 협의체인 브릭스의 몸집 키우기에 나섰다. 지난 8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제15차 브릭스 총회에서 이란·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연합·에티오피아·이집트·아르헨티나 등 6개 나라가 새 회원국으로 합류하며 ‘브릭스 플러스’로 진화했다. 이들 신규 회원국 외에도 알제리와 베트남, 방글라데시, 쿠바 등 20여 국가가 이미 블록 가입을 공식 요청한 상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는 북한, 이란 등 비슷한 처지의 나라들과 밀착하고 있다. 러시아와 북한은 지난 9월13일 정상회담을 열고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외신들은 “더 잃을 게 없는 나라들의 연합”이라고 평했지만,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을 깰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세계 평화 위협 요소는 하나 더 추가됐다.

러시아는 아프리카 대륙과도 관계성을 강화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푸틴 대통령이 반(反)서방 성향 아프리카 지도자들까지 규합해 (국제사회의) 훼방꾼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2020년 이후 니제르, 말리, 부르키나파소 등 아프리카 사헬 지역 6개국에서 잇따라 쿠데타가 발생, 친서방 지도자들이 축출된 것은 아프리카 내 러시아 입김이 커진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블록의 강화는 또 다른 블록의 강화라는 반작용을 부른다. 러시아의 위협에 스웨덴과 핀란드가 200년의 중립국 역사를 깨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에 나서고, 루블린 삼각지대(리투아니아·폴란드·우크라이나)와 노르딕 5개국의 방위협력체가 전략적·군사적 통합을 밀어붙이고 있다.

커지는 스윙스테이트 영향력

소다자주의 연합으로 똘똘 뭉친 몇몇 나라는 초강대국과 거리를 두며 스윙스테이트(경합국가)를 자처하고 나섰다. 장기적인 공동 목표를 추구하는 대신 단기적인 경제·안보 이익을 위해 힘을 합치는 행보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이를 두고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15일 낸 ‘지정학적 스윙스테이트의 부상’이란 보고서에서 “21세기는 지정학적 ‘다중동맹(multi-alignment)’의 시대로, 스윙스테이트가 국제협력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선도국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스윙스테이트는 원래 미 대선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몇몇 주를 일컫는 말이다. 국제정치에서도 새로운 국제협력 질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들이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비동맹주의를 표방하는 브라질은 대표적인 스윙스테이트로 꼽히며, 인도네시아 등은 니켈과 같은 주요 광물을 무기로 삼아 ‘자원 민족주의’로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인도의 줄타기 외교를 대표적인 스윙스테이트 행보로 꼽기도 했다. 그간 인도는 세계 질서의 어느 쪽에도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국익을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표방해왔다. 실제로 인도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4자 안보 협력체인 쿼드 회원국이면서 동시에 중국이 이끄는 신흥국 협의체 브릭스의 일원이다. 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규탄하는 대열에 서는 대신, 헐값에 러시아산 원유를 사들이며 교역을 확대하는 등 줄타기 외교를 이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글로벌 웨스트(미국·유럽 등 동맹국), 글로벌 이스트(러시아·중국·이란 등 동맹국), 글로벌 사우스 등으로 재편된 ‘다극화된’ 세계 질서 속에서 인도와 같은 스윙스테이트 국가들은 끈끈한 동맹이 아닌, 느슨한 파트너십인 ‘다중동맹’을 내걸고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자기구 ‘한계’…다중경쟁 시대 도래

이러한 세계 질서 변화 흐름에 대해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는 “다자주의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통합을 촉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소다자주의와 스윙스테이트가 힘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달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연설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의 미래를 “개혁, 아니면 파열”이라고 암담하게 내다봤다. 1945년 세계 전쟁 재발을 막고 국제협력을 위해 설립된 유엔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올해 유엔총회에 참석한 안보리 상임이사국 정상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유일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불참은 어느 정도 예상됐다 해도, 프랑스 대통령과 영국 총리까지 불참한 건 유엔의 위상 추락을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올해 유엔총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유엔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미국을 비롯해 튀르키예, 독일, 우크라이나 등은 안보리 상임이사국 확대를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에 대해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하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중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결의안을 채택할 수 없다. 미국 등 서방과 중·러가 대립하는 상황에서는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다.

문제는 유엔만 이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생겨난 IMF와 WB 역시 아프리카 등 저소득 국가의 부채 문제가 뇌관처럼 자리 잡은 상황에서 별다른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다자주의 시대가 저물고 ‘다극성’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3개국 정도가 동등한 권력과 지위를 가지는 ‘단극성’이 아닌, 이보다 더 많은 여러 개의 권력이 다중적으로 경쟁하는 시대다. 여기에 민주주의·자유주의 등 신념을 공유하는 동맹보다는, 경제적·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십이 대세가 되면서 각국의 셈법은 더 복잡해졌다.

특히 권력 경쟁이 군비 경쟁으로 이어져 핵무기가 확산될 가능성도 다중경쟁 시대의 위험으로 꼽힌다. 이란이 핵무기를 확보하게 되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 튀르키예, 이집트 등이 모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북한의 위협에 맞서 한국과 일본에서 대두되는 핵무기 무장론을 잠재우려면 동맹인 미국은 확실한 핵우산 보장을 해야 한다. 이 같은 점에서 2~3개의 강국이 경쟁하며 세계의 질서를 이끌던 ‘단극성’ 시대보다 여러 나라가 경쟁하는 ‘다극성’ 시대의 불확실성이 훨씬 크다고 포린폴리시는 설명한다.

2015년 그레이엄 앨리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미·중 경쟁이 초래하는 세계 질서의 붕괴를 고대 그리스의 ‘투키디데스 함정’에 빗댔다. 이제 세계는 ‘투키디데스 함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러 패권국이 가져오는 불확실성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브라운 전 총리는 “아테네를 무릎 꿇린 스파르타는 결국 아테네보다 더 작은 국가들의 패권 경쟁에 직면하며 멸망의 길을 걸었다”면서 미·중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진 사이 세계는 새로운 질서 속에 예측하지 못할 위험에 휘말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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