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80년 5월

80년 5월 우리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광주 변두리 송정리 독산에는 아카시아꽃이 만발했다. 남자아이들은 비료포대로 글러브를 만들어 야구를 하고, 여자아이들은 고무줄 놀이를 했다. 어른들은 그해 유독 보리밭에 깜부기가 많다고 걱정했지만 우리는 깜부기를 뽑아 꺼먼 가루를 뿌리며 놀았다.

시위대를 처음 본 곳은 송정리역 부근이었다. 젊은이 20명가량이 대창목재소 트럭에 올라탄 채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시위대는 소리를 더욱 높였다. 송정리역과 금남로, 전남도청을 오가는 5번 시내버스가 트럭을 뒤따랐다. 버스에도 시위대가 타고 있었다. 창문마다 한 사람씩 고개를 내밀고는 손바닥으로 차체를 두드리며 구호를 외쳤다.

며칠 뒤 갑자기 학교가 문을 닫았다. 아침부터 야구를 하려고 모여 있는데 누군가 도로를 가리키며 “탱크가 온다”고 말했다. 우리는 탱크를 구경하러 광송 4차선 도로로 뛰어갔다. 굉음과 함께 탱크 대여섯대가 지나가자 아스팔트 바닥이 갈라졌다. 탱크 뒤로 군인들 행렬이 한참 이어졌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동네 아주머니가 양동이에 물을 퍼와 바가지와 함께 건넸다. 군인들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허겁지겁 받아 마셨다. 중사 계급장을 단 군인이 무전기로 통화를 하다 말고 대오를 이탈한 군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교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즈음 무서운 이야기가 돌았다. 시내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여학생 한 명은 가슴이 잘려나갔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군청 공무원인 친구는 그런 말이 모두 ‘유언비어’라고 했다. TV에서는 폭도들이 군인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왔다. 폭도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기 위해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 체포됐다는 뉴스도 있었다.

마침내 학교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수업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탄피를 주우러 주변 산에 소풍을 갔다. 토끼몰이하듯 한 줄로 늘어선 뒤 산 정상까지 훑었다. 탄피를 발견하면 상으로 공책을 받았다. 공책을 받고 싶은 욕심에 학교에서 파한 후 탄피를 찾아 산을 뒤지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길던 5월이 지났다. 여름·가을·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독산엔 아카시아꽃이 다시 피었지만 사람들은 그해 5월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았다. 우리도 시위대와 탱크와 군인들을 기억에서 지웠다.

‘광주 비디오’를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겨울이었다. 학교 앞 만화방 주인이 어디선가 테이프를 구해와 틀어줬다. 비디오를 본 그날 밤, 우리는 갑자기 철이 들어버렸다. 얼마 뒤 교실에는 ‘월간 신동아’에 실린 ‘광주사태’ 기사 복사본이 나돌았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던 친구는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정석을 덮고 운동권이 됐다. 우리는 선생님께 물었다. 80년 5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선생님은 창밖으로 눈을 돌린 채 “무등산은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났다.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폭도들은 누명을 벗었다. 그들이 묻힌 망월동 공동묘지는 국립 5·18 민주묘지가 됐다.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다. 국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로 5·18의 전모가 밝혀졌다. 하지만 시위대에 발포하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그 사람, 지금 무슨 생각 할까. 그는 80년 5월을 어떻게 반추하고 있을까.

▲ 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세력이 비상계엄 확대조치 반대시위를 막기 위해 투입한 공수특전단의 초강경 유혈진압에 맞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벌인 민주화항쟁. 193명(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 죽고 852명이 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