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 싸우는데 우리편 안 들어준 정부·국민에 섭섭”

글 백인성 기자·사진 권호욱 선임기자

일제 강제징용 소송 제기한 신천수 할아버지

신천수 할아버지(87·사진)는 묻고 또 물었다. “이겼어?” “진짜 이겼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신 할아버지는 24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대법원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15년 동안 이어진 법정다툼에서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대법원에) 가보지 못한 게 원통해.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어. 그래도 기뻐.” 신 할아버지는 한참 지나서야 웃었다.

“한국 사람이 싸우는데 우리편 안 들어준 정부·국민에 섭섭”

1926년 전남의 한 농촌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자리를 찾아 16살 때인 1942년 평양으로 갔다. 이듬해 신일본제철의 일본 오사카제철소로 강제징용을 당했다. 그는 “말이 제철소이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100여명의 한국인이 일하던 이 공장에는 경찰이 상주했다. 경찰은 “도망가면 곧바로 가족에게 해가 간다”고 위협했다. 밤에는 기숙사라고 불리는 2층짜리 목조 건물에 내동댕이쳐졌다. 신 할아버지는 “창에는 쇠창살이 끼워져 있었고 밤에는 문에 자물쇠가 채워졌다”며 “기숙사 주변 높은 곳에는 항상 탈주자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제철소의 거대한 용광로 바로 옆에서 일했다. 용광로가 꺼지지 않도록 쉬지 않고 삽으로 석탄을 퍼부어야 했다. 석탄이 잘 타도록 덩어리를 부수는 일도 했다. 일본인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 고된 일이었다.

그는 “하루에 12시간씩 쉬지 않고 일했다”며 “일을 마치고 바닥에 침을 뱉으면, 침이 온통 새까만 먼지투성이였다”고 말했다.

대접은 형편없었다. 도시락의 밥은 바닥에만 얇게 깔려 있었다. 반찬은 단무지 몇 조각이 전부였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바닷가에서 조개를 주워 날로 먹었다. 월급은 기숙사의 사감이 가져가 은행에 넣었다. 돈이 많으면 도망갈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신 할아버지가 강제 노동에서 벗어난 것은 1945년 3월 미군의 공습으로 제철소가 파괴되면서다. 그는 “낮이었는데도 어둑어둑할 정도로 폭탄이 하늘을 메웠다”고 했다. 신 할아버지는 공장의 두꺼운 철판 밑에 숨어 목숨을 구했다.

인근 도시에서 몇 달을 보낸 신 할아버지는 해방 직후 귀국했다. 귀국 전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신일본제철 측에서는 “다시 오면 주겠다”고 속였다. 한국에 와서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서울 신일본제철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감옥 같은 곳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받은 2년치 월급을 모두 떼인 것이다.

<b>일본 시민단체의 ‘승리’ 응원</b>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신천수씨가 1997년 12월24일 오사카 지방재판소 앞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승리의 그날까지’라고 쓰인 액자가 신씨 자택 거실에 걸려 있다. 사진 주위에는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이 쓴 응원의 글이 빼곡히 적혀 있다. | 백인성 기자 fxman@kyunghyang.com

일본 시민단체의 ‘승리’ 응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신천수씨가 1997년 12월24일 오사카 지방재판소 앞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승리의 그날까지’라고 쓰인 액자가 신씨 자택 거실에 걸려 있다. 사진 주위에는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이 쓴 응원의 글이 빼곡히 적혀 있다. | 백인성 기자 fxman@kyunghyang.com

신 할아버지는 1997년 12월24일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며 자신의 돈을 찾기 위해 나섰다. 싸움은 쉽지 않았다. 일본 법원은 강제노역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1965년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모두 소멸됐다고 했다. 일본에서의 소송은 2002년 오사카고등재판소에서 패소한 뒤 상고를 포기하면서 확정됐다.

그는 여운택씨(89)를 비롯한 동료 4명과 함께 “한국에서 판결을 받아보자”며 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냈다. 그러나 다시 패소했다. 서울고법에서 패소한 뒤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사실상 희망을 버렸다. 한 명은 상고를 포기했다. 이날 대법원에는 이들 중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신 할아버지는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신 할아버지는 한국 정부가 도와주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한국 사람이 싸우는데 우리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녀? 국민이라고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도 없었어. 내가 아흔이 눈앞인데 먼저 돌아가신 분도 있고. 그런 피해자들이 우리만 있겠어.”

그는 한때 정부에 실망해 국적포기 신청서를 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다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다시 소송에 나섰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신 할아버지에게 비행기삯과 숙식비를 지원해주며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의 집에는 ‘승리의 그날’이라고 적힌 사진이 든 액자가 벽에 걸려 있다. 1997년 12월24일 오사카 법원에 제소하러 가는 길에 지지 말자며 여운택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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