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감 없는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국내적 혼란과 역풍 조짐

유신모 기자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자들이 정부의 해법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자들이 정부의 해법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12일 공개토론회 형식으로 공개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해법의 기본 골격은 ‘제3자 변제’다. 대법원 판결로 배상 의무를 갖게된 일본의 피고 기업 대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수혜를 본 포스코 등 국내 기업이 기부금을 내 피해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공개토론회에서 언급된 방식은 최종 해법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미 이같은 해법에 한·일이 공감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변이 없는 한 ‘일본 기업이 빠진 제3자 변제’의 틀은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추진안은 균형감을 상실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본 기업에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내기업이 배상금을 대신 지급하고 배상 의무를 가진 일본 기업을 면책시킨 것은 그동안 일본이 주장했던 바를 그대로 수용한 내용일 뿐 법원의 판결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한 협상 결과물이다. 또한 피해자들의 즉각적인 반발에서 알 수 있듯이 피해자의 의견이 반영된 흔적이 없다. 특히 피해자 동의를 얻지 않아도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점을 내세움으로써 문제 해결보다 피해자들이 법적 판결을 통해 얻은 채권을 소멸시키는데 우선적으로 집중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피해자 측의 최소 조건도 충족 못해

일본기업의 직접 배상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제3자 변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은 피해자 측이 이미 양해한 사안이다. 4차례에 걸친 민관협의회에서 피해자 측은 제3자 변제에 동의하면서 일본 피고 기업이 기부금 조성에 참여할 것과 일본 측의 사과를 최소한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정부안은 국내기업 주도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일본 기업이 ‘성의있는 호응’ 차원에서 동참하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다. 일본 측의 사과도 기업이 아닌 일본 정부가 나서서 역대 내각의 관련 입장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추진안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일본 기업과 피해자의 ‘사인(私人) 간 쟁송’으로 보는 한국 정부의 입장과 국가 간 문제로 간주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일본 측의 주장이 고스란히 관철된 결과다. 또한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적시한 대법원 판결의 의미와 취지를 일본과의 협상에서 전혀 반영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협상력에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4차례 민관협의회에 참여한 길윤형 한겨레 기자는 이날 토론에서 “민관협의회 결론은 재단이(배상금을) 지불하되 피고기업의 기금 참여와 사죄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며 “지금 정부의 이야기는 일본 기업의 사과와 배상 참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먼저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민관협의회에서의 전제조건이 많이 무너진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균형감 없는 해법

강제징용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어느 정도 포함하면서 일본이 수용할 수 있고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해법이 필요하다. 법적·역사적·외교적·정서적 요소를 모두 감안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을 만족시키는 해법은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난제였다. 하지만 정부의 추진안은 일본이 수용 가능하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해법일뿐 역사적·정서적 요소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병존적 채무인수’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 것은 정부가 채권자(피해자)의 채권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찾는데만 골몰했다는 인상을 주기 충분한 것이어서 피해자들의 반발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익명의 전문가는 “이런 식으로 법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면 강제징용 문제를 두고 역대 정부가 고민하고 지금까지 끌고올 이유가 없었다”면서 “정부가 너무 문제 해결을 쉽게 생각하고 있거나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법적으로는 문제 없나

정부 안은 피해자 동의 없이도 3자 변제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중요한 근거로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최우균 변호사는 제3자 변제와 병존적 채무인수 방식의 법리에 대해 설명했다. 민법 조항에는 3자 변제를 채권자가 허용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도록 돼 있지만 이번 사건은 대법원 확정판결로 발생한 ‘법정 채권’이어서 피해자의 동의 없이도 제3자 변제가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피해자 동의가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추후 법정 공방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제3자 변제를 위해서는 채무자(일본기업)와 인수자(재단)의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의한 채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피고 기업과 합의가 가능한지도 불투명하다. 포스코가 일본 기업을 대신해 채무를 변제한 뒤 구상권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 만일 포스코가 구상권을 갖지 않는다면 배임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감당하기 어려운 역풍

정부의 추진안은 최종 해결까지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여론의 비판을 돌파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안이 국내 여론을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정부가 ‘기대하는’ 대로 일본 피고기업이 성의있는 호응을 하고 기부금 조성에 동참할 것인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만일 일본 피고기업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 거센 반발과 정부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다. 또 일본 측의 사과 내용과 수위, 형식도 변수다. 또한 피해자 측은 물론 시민단체·야당까지 한 목소리로 정부 안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한·일 문제가 다시 정치의 한복판에 서는 상황이 발생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재의 정부안이 강행될 경우 일본과의 문제는 해결되지만 국내적 혼란을 초래해 결국 2015년 위안부 합의처럼 유명무실한 해결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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