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탔지만 숲은 이겨냈다···지리산 산불 달랐던 비밀은 활엽수림

김기범 기자

축구장 127개 면적 탔지만 이겨낸 지리산 낙엽활엽수림

1967년 국립공원 지정 뒤 사람 손길 타지 않은 덕분

전문가들 “자연성 높은 활엽수림 통한 예방이 중요”

합천선 임도 잘 갖춰 신속 진화했지만 소나무 전멸

지난달 30일 드론으로 촬영한 지리산국립공원 산불 피해지역의 모습. 숲 내부에 들어가지 않으면 산불 피해지역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숲이 보존돼 있었다.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제공.

지난달 30일 드론으로 촬영한 지리산국립공원 산불 피해지역의 모습. 숲 내부에 들어가지 않으면 산불 피해지역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숲이 보존돼 있었다.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제공.

참나무, 신갈나무 등 활엽수들은 봄을 맞아 푸른 잎을 틔우고 있었고, 진달래와 벚나무 등은 만개한 꽃을 자랑했다. 지표의 풀 일부는 이미 무성하게 자랐다. 불과 19일전 축구장 127개 면적에 해당하는 삼림을 태운 산불이 일어났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리산 낙엽활엽수림의 생명력은 이미 산불을 이겨내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정인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국장과 함께 찾은 경남 하동 화개면 지리산국립공원 대성골의 산불 피해지역은 언뜻 보면 대형 산불이 났던 곳 같지 않았다. 피해지역을 휩쓴 산불이 수관화(樹冠火)가 아닌 지표화(地表火)였던 덕분에 주로 활엽수로 이뤄진 숲의 구성원들은 하룻밤새 100㏊ 넘는 면적을 태운 대형 산불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한 모습으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수관화는 나무의 가지나 무성한 잎을 태우며 지나가는 산불, 지표화는 땅에 가까운 잡초·관목·낙엽 등을 태우는 산불이다.

지난 11일 산불이 발생한 지리산국립공원 능선부 소나무숲의 지난 30일 모습. 산불 피해를 이겨낸 활엽수림과 달리 소나무 등 침엽수들은 불에 탄 채 죽어있었다. 김기범기자

지난 11일 산불이 발생한 지리산국립공원 능선부 소나무숲의 지난 30일 모습. 산불 피해를 이겨낸 활엽수림과 달리 소나무 등 침엽수들은 불에 탄 채 죽어있었다. 김기범기자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이번 지리산 산불의 피해가 적었던 이유로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이후 자연적으로 조성된 활엽수림을 지목한다. 실제로 이날 탐방로를 따라 광범위한 피해지역을 돌아본 결과 참나무 등 활엽수들은 아래쪽 껍질만 그을린 정도로 피해가 그쳤던 반면 피해지역 내에 얇은 띠처럼 형성돼 있는 능선부에 자리잡은 소나무들은 모두 산불을 이겨내기 못하고, 불에 탄 채 죽어있었다. 소나무에서 불과 몇 m 떨어진 곳에서는 참나무가 신록을 보일 준비를 하고 있어 대조적이었다.

지난달 11일 발생한 지리산 산불이 멈춘 계곡부의 모습. 사진 오른편이 산불 피해지역이지만 왼쪽의 산불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과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김기범기자.

지난달 11일 발생한 지리산 산불이 멈춘 계곡부의 모습. 사진 오른편이 산불 피해지역이지만 왼쪽의 산불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과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김기범기자.

지난달 29일 현장을 둘러본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등 전문가들은 이번 산불이 규모는 컸지만 활엽수 윗부분까지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며 지표화 형태로 조릿대 등 아래쪽의 풀을 태우면서 진행된 산불이라고 설명했다. 능선부의 침엽수림에서 일부 강한 강도 산불로 인한 피해도 있었지만 대부분 낙엽이 타는 정도로 활엽수 피해는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달 11일 발생한 산불은 민가, 도로변에서 가까운 지점에서 시작돼 능선을 타고 번져갔지만 계곡을 만나면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고, 다음날 내린 비로 완전히 꺼졌다. 소나무 위주 침엽수림이었다면 줄기나 가지 등이 타면서 계곡물을 넘어가 피해면적이 더 넓어졌을텐데 활엽수 위주의 숲이 조성돼 있었기 때문에 피해면적이 생각보다 적었고, 산불 강도도 높지 않았다.

지난 11일 산불이 발생했던 경남 하동 지리산국립공원 대성골의 모습. 이 지역에서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산불 피해지역이라는 것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가벼운 피해만 발생했다. 김기범기자

지난 11일 산불이 발생했던 경남 하동 지리산국립공원 대성골의 모습. 이 지역에서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산불 피해지역이라는 것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가벼운 피해만 발생했다. 김기범기자

홍 교수가 위성영상을 통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산불 강도가 낮은 지역이 전체의 80%를 차지했고, ‘매우 높음‘ 지역은 없었다. ‘높음’에 해당하는 지역은 전체 산불피해면적의 3%에 불과했다. 홍 교수는 “산불 강도가 낮았던 것은 해당지역의 사면부 식생 대부분이 자연적인 숲의 발달에 의해 소나무림이 쇠퇴하고 낙엽활엽수림으로 발달하는 과정의 숲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위적 간섭이 없어 활엽수의 밀도가 높은 덕분에 숲 내부 바람이 세지 않아 산불이 지표화가 돼 서서히 이동하다가 능선부의 소나무숲에 다다라서야 수관을 태운 것으로 확인됐다”며 “앞으로 소나무 피해가 발생한 지역은 빠르게 낙엽활엽수림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1일 지리산국립공원 산불과 지난 8일 합천 산불 피해지역의 산불강도 구분. 붉은 색이 짙을수록 산불 강도가 강했음을 의미한다. 부산대학교 제공.

지난 11일 지리산국립공원 산불과 지난 8일 합천 산불 피해지역의 산불강도 구분. 붉은 색이 짙을수록 산불 강도가 강했음을 의미한다. 부산대학교 제공.

전문가들은 이번 지리산 산불이 ‘활엽수림이 산불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다’는 논문이나 학술서적 속 지식을 실제 증명한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다량의 물을 품어 ‘물기둥’이나 다름없는 활엽수가 건조한 곳에서 잘 자라는 소나무에 비해 불에 강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그래도 자연적으로 조성된 활엽수림이 대형 산불마저 이겨내는 사례는 드물다. 수십년 동안 사람이 숲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 활엽수림이 조성된 국립공원에서는 큰 산불이 일어난 사례 자체가 많지 않다. 이번 산불의 원인은 주민들의 실화로 추정된다.

임도가 설치돼 있었지만 지난 8일 산불로 소나무 등 침엽수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경남 합천 산불 피해지역의 지난 30일 모습. 김기범기자

임도가 설치돼 있었지만 지난 8일 산불로 소나무 등 침엽수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경남 합천 산불 피해지역의 지난 30일 모습. 김기범기자

지리산 산불을 계기로 ‘국립공원 임도 설치’에 대한 논란이 다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산불이 발생한 뒤 산림청은 국립공원이라 임도가 없는 탓에 야간 진화작업이 어려웠고, 피해 면적도 컸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지난 8일 발생한 합천 산불은 임도 덕분에 신속한 진화가 가능했다며 국립공원에도 임도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림청은 지난 15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합천과 지리산 산불을 비교하면서 현재 332㎞인 산불진화임도를 매년 500㎞ 이상씩 늘려 2027년까지 3207㎞로 확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8일 발생한 산불로 침엽수림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경남 합천 산불 피해지역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임도가 잘 갖춰져 있었지만 피해를 줄이는 것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제공.

지난 8일 발생한 산불로 침엽수림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경남 합천 산불 피해지역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임도가 잘 갖춰져 있었지만 피해를 줄이는 것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제공.

지리산 현장을 돌아본 뒤 방문한 합천 산불 피해지역의 소나무숲은 잘 갖춰진 임도가 무색하게도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불에 타 죽었거나 아직은 살아있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게될 상태의 나무가 대부분이었다. 전문가들은 산림청 주장과 달리 지리산과 합천 산불은 불이 난 뒤 임도를 통한 진화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을 통한 예방이 더 우선임을 나타낸다고 지적했다. 산림청 내부 관계자도 국립공원공단, 환경단체, 산림청 등의 지리산 산불 관련 간담회에서 지리산 피해지역은 급하게 복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1일 발생한 지리산 산불로 낙엽과 초본, 관목 등이 불에 탄 뒤에도 토양 내에 그대로 빽빽하게 남아있는 풀뿌리의 모습. 김기범기자.

지난 11일 발생한 지리산 산불로 낙엽과 초본, 관목 등이 불에 탄 뒤에도 토양 내에 그대로 빽빽하게 남아있는 풀뿌리의 모습. 김기범기자.

산림청은 산사태 위험 등을 이유로 지리산 피해지역 복구 작업과 임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 역시 반대하고 있다. 현장을 둘러본 박석곤 순천대 조경학과 교수와 최윤호 백두대간숲연구소 소장은 공통적으로 “표층부만 불에 탔을뿐 조릿대 등의 뿌리가 토양층 내에 잘 보전돼 있어 산사태 우려는 적다”고 밝혔다. 실제 현장에서 살펴본 피해지역 토양 내에는 빽빽하게 얽히고설킨 조릿대 뿌리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지리산 산불은 최근 10년 사이 국립공원에서 난 산불 가운데 최대 규모다. 산림청이 발표한 피해면적은 91㏊이고, 국시모와 전문가들이 현장 조사와 위성 영상으로 추정한 피해면적은 121㏊이다. 이는 축구장(7140㎡) 169.5개에 해당하는 넓이이자 최근 20년간 국립공원 내 산불피해면적을 모두 합한 111.8㏊보다 더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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