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전쟁과 상처, 그리고 선악의 거미줄

이영경 기자

카시지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공경희 옮김

문학동네 | 684쪽 | 1만8000원

미국 소설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장편소설 <카시지>는 전쟁의 참상, 형벌과 도덕에 대한 질문을, 한 가족에게 닥친 비극적 사건을 통해 풀어낸다. 오츠는 2019년 예루살렘상을 수상했으며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꼽힌다. ⓒMarion Ettlinger

미국 소설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장편소설 <카시지>는 전쟁의 참상, 형벌과 도덕에 대한 질문을, 한 가족에게 닥친 비극적 사건을 통해 풀어낸다. 오츠는 2019년 예루살렘상을 수상했으며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꼽힌다. ⓒMarion Ettlinger

벌레가 꼬이는 습하고 무더운 2005년 한여름, 뉴욕주 북부 카시지의 산림보호구역에서 19세 소녀가 실종된다. 크레시다의 아버지 제노 메이필드는 변호사 출신의 전직 시장으로, 절망한 채 수색대에 합류해 딸을 찾아 헤맨다. 대대적 수색이 벌어지던 중 뜻밖의 용의자가 잡힌다. 크레시다의 아름다운 언니 줄리엣의 약혼자였던 브렛 킨케이드 상병. 브렛은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시력을 상실한 한쪽 눈, 티타늄으로 고정한 골절된 두개골, 비뚤어진 척추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채로. 약혼자를 기다리던 줄리엣은 브렛과 결혼하려 노력하지만, 브렛은 자신의 변한 모습과 줄리엣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둘은 파혼하고, 얼마 뒤 그 ‘사건’이 발생한다. 브렛은 이제 ‘부상당한 참전 군인’과 ‘끔찍한 살해범’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 사이를 오간다.

미국의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작가로 꼽히는 조이스 캐롤 오츠(81)의 장편소설 <카시지>는 한 가족에 닥친 비극을 통해 전쟁과 폭력, 믿음과 정의, 도덕과 형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노장이자 다산의 작가인 조이스 캐롤 오츠는 사실주의적 소설부터 고딕 호러 소설, SF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를 선보여왔다. <카시지>에서 오츠는 다시 단단한 현실로 돌아온다. 1970년대 이상적인 가족이 강간이라는 범죄를 겪으며 해체되는 모습을 그린 <멀베이니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작가는 전쟁과 폭력, 형벌이라는 사회적 문제 속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가족 안의 갈등, 인간의 심리적 문제까지 솜씨 좋게 엮어낸다.

총 3부로 구성된 680쪽이 넘는 소설은 각 부가 별도의 소설이 될 만큼 풍부한 이야기와 질문을 던진다. 1부가 전쟁의 참상과 참전 군인들의 상처를 끔찍한 사건과 결부시켜 미스터리처럼 풀어나간다면, 2부는 미국 교정시설과 형벌 시스템에 대한 르포처럼 읽힌다. 3부에선 비극으로 산산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 서로의 상처를 직시하고, 조심스럽게 회복과 치유를 모색한다.

<카시지>는 우선 전쟁이 남긴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브렛의 아버지는 걸프전에 참전했고, 아버지의 사촌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브렛은 2001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9·11테러 이후 자진해서 군에 입대한다. 운동부 출신의 훤칠한 청년이자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 좋은 성품을 지닌 브렛은 이라크에서 철저히 망가진다. 그가 목격한 것은 끔찍한 테러범이 아닌 동료 미군의 민간인 살상이었다. 동료가 이라크 소녀를 끔찍하게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을 목격한 그는 ‘적’이 아닌 동료에 의한 보복범죄 위협에 시달린다. 그의 몸을 날려버린 폭탄은 테러범이 설치한 것이 아니었다.

[책과 삶]전쟁과 상처, 그리고 선악의 거미줄

브렛은 크레시다를 살해하고 유기한 ‘살인범’으로 몰리지만, 그의 어머니 에설은 ‘장애를 가진 이라크 전쟁 참전 용사’임을 호소해 변호사를 선임하고 여론몰이를 한다. 소설엔 베트남전에서 걸프전, 이라크전으로 이어지는 미국 전쟁의 역사 속에 어떻게 애국주의가 왜곡된 신념으로 변질되고, 누가 진짜 희생자인지 묻는다. 소설은 “사람들은 전쟁에 나갈 사람들이 미국 하층민이란 걸 알았고, 국방부도 이를 파악했다” “자본가들이 빌어먹을 큰 송유관을 꽂는 거지. 그게 부시가 전쟁을 선포한 이유야! … 가여운 이 미련한 아이가 이른바 부수적 피해라는 걸 입었는데, 일단 군복을 벗으면 아무도 신경 쓰질 않아”라고 말한다.

2부에선 미국 ‘형벌 제도’의 정당성에 대해 파헤친다. 크레시다는 구조돼 ‘새버스 맥스웨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는다. 신분을 속이고 잠입해 취재한 글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힌턴의 인턴으로 취직, 중범죄자 교도소에 그와 함께 잠입한다. 힌턴은 ‘이노센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데,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들의 실상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260명 이상의 기결수들이 DNA 검사를 통해 결백을 증명하게 됐고, 대부분 검은 피부를 가진 그들이 실제로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는지” “유색인종과 애매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해”라고 소설은 말한다. 새버스가 묘사하는 중범죄자 교도소의 풍경은 그 자체로 훌륭한 르포다. 교도소 사형집행장에 들어간 새버스는 그가 지우려 했던 과거의 끔찍한 상처를 떠올린다. 브렛과 가족이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

3부는 크레시다가 실종된 후 7년 동안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해체되고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가부장적이면서도 가족을 보호하는 걸 자신의 가치로 여겼던 제노는 가족이 붕괴됐다는 사실에 상실감을 느낀다. 남편에게 의지하는 충실한 아내였던 아를렛은 남편을 떠나 유방암 투병을 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줄리엣 또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끔찍한 과거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가족을 꾸렸다. 살아 돌아온 크레시다는 이들에게 마냥 축복일 수 있을까? 현실은 복잡하다. 브렛은 중범죄자 교도소에 수감됐으며 ‘과거의 브렛’을 여전히 사랑하는 줄리엣에게 크레시다를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선과 악은 명확히 나뉘며, 우리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선과 악은 거미줄처럼 사회구조와 인간관계와 얽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을 무 자르듯 자르는 건 거미줄을 칼로 매끈히 자르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눈길을 끄는 건 크레시다의 캐릭터다. 크레시다는 똑똑하지만 ‘못된’ 아이이며, 자폐증을 의심받기도 한다. 줄리엣은 반대로 아름답고 착한 딸이다. 남자아이 같은 크레시다는 사랑에 결핍돼 있으며 자신의 성정체성과 욕구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동시에 “성정체성이 눈동자 색깔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적 규범과 욕망 사이에 갈등을 겪는 크레시다, 전쟁으로 모든 걸 잃은 브렛, 두 사람의 인연은 고약하게 비틀렸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다. 운명처럼. 하지만 그 운명은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게 아니다. 역사와 사회 속에 휩쓸린 두 개인 사이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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