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잃은 거리에서 2030에 고함’…언니가 손으로 쓴 대자보 “다녀왔습니다”

전지현 기자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유연주씨의 언니 유정씨가 21일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이태원참사 추모의 벽에서 2030세대에게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사진 크게보기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유연주씨의 언니 유정씨가 21일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이태원참사 추모의 벽에서 2030세대에게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서울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 고 유연주씨의 언니 유정씨(27)는 21일 동생을 잃은 이태원 골목길 초입에 펜을 들고 섰다. 사남매중 둘째. 독립심도 의협심도 강해 늘 든든하던 동생 연주씨에게 첫째인 유씨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다녀왔습니다” 여섯 글자다.

그 말을 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는지 이유를 밝혀 달라고 1년 넘게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외쳐 온 그는 이날 홀로 이태원 참사 추모의 벽 앞에서 대자보를 써내려갔다. 2030 청년 세대에게 “함께 행동하고, 내일을 위해 투표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서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선거날 투표하는 게 다였다”는 유씨는 참사에서 동생을 잃은 뒤 정치가 삶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정책의 부재로 상처를 입거나 죽은 청년들을 국가가 외면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22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이태원 핼러윈 참사, 전세사기, 해병대 채 상병 사건, 서초구 한 초등학교 교사 순직 등 청년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에 목소리를 내보자는 이철빈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의 제안에 유씨가 응한 이유다. ‘2030 유권자 네트워크(가칭)’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알리고 투표를 독려하는 릴레이 대자보를 쓰기로 했다.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유연주씨의 언니 유정씨가 21일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이태원참사 추모의 벽에서 2030세대에게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한 후 사진을 찍고 있다. 김창길 기자 사진 크게보기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유연주씨의 언니 유정씨가 21일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이태원참사 추모의 벽에서 2030세대에게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한 후 사진을 찍고 있다. 김창길 기자

첫번째로 나선 유씨는 대자보에 “유가족과 시민들이 간절하게 바라왔던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은 대통령이 특별법에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함으로써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외면 당했다”면서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은 우리 사회를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더 고립된 개인주의로 몰아넣었다”고 썼다.

유씨는 “사회적 참사와 부실한 국가정책의 피해자인 우리 청년들은 새벽을 기다리며 서로 손잡았다”면서 “비록 나의 행동은 작은 날갯짓에 불과할지 모르나 우리의 날갯짓은 큰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오후 2시 시작해 30여분 간 전지 크기의 하얀색 종이에 글을 쓰내려간 그는 “지겨운 절망을 넘어 내일 위해 투표하자”라면서 끝을 맺었다.

유씨는 대자보를 쓰려고 동생을 잃은 골목 입구에 홀로 찾아온 데 대해 “사실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사고 현장인 골목을 등지고 대자보를 작성한 그는 “뒤편 어디에서 연주가 발견됐고 구급조치를 받았는지 알기 때문에 등쪽으로 신경이 쓰였다”면서 “최대한 글씨를 쓰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골목길에 찾아온 건 “기억에서 참사가 잊힐까 두렵고, 참사가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에서라고 했다.

유씨가 대자보를 쓰던 시각 앞을 지나던 용산구 주민 김지은씨(38)는 “언니 분과 다른 유가족 분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크게 목소리 내지 못해도 함께 아파하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픈 사람들이 많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유씨를 시작으로 22일엔 경북대에서 해병대 예비역 대학생 신승환씨와 서초구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익명의 예비 초등교사가, 23일엔 화곡역 인근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이철빈씨가 대자보를 쓸 계획이다. 유씨는 “대자보를 모아 여러 대학에 붙일 생각”이라며 “청년인 학생들에게 저희의 대자보가 가닿아 함께 행동하겠다는 분들이 늘어나면 좋겠다”고 했다.

“다녀왔습니다”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59명의 희생자들이 영원히 할 수 없는 말.
영문도 모른 채 하늘의 별이 된 제 동생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입니다.
유가족과 많은 시민들이 간절하게 바라왔던 이태원참사의 진상규명은 대통령이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외면당했습니다.
참사의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것도 모자라 금전 지원을 운운하며 마치 유가족들이 배·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인 양 프레임을 씌우고 있습니다.
오로지 마약 수사에만 혈안이 되어 다중 인파 관리는 소홀했던 것이 참사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태원에 방문한 희생자들이 문제라며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진상규명을 바라는 우리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서울 시내 모든 길을 걸었고 온몸으로 기었습니다.
서로 잡은 연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전국을 뛰어다녔습니다.
수천, 수만 번을 외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태원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단초가 되었고 우리의 작은 날갯짓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은 우리 사회를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더 고립된 개인주의로 몰아넣었습니다. 심지어 청년들의 입은 틀어막혔고 사지는 억압당했습니다. 국민의 죽음에는 도피와 외면, 변명만 난무했고 민생·경제·외교를 비롯한 국가살림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부끄럼 없는 정부와 여당은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만 민생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무참히 짓밟혔으며 민주주의는 사라졌습니다.
사회적 참사와 부실한 국가정책의 피해자인 우리 청년들은 새벽을 기다리며 서로 손잡았습니다. 비록 나의 행동은 작은 날갯짓에 불과할지 모르나 우리의 날갯짓은 큰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불공정과 비상식에 맞설 용기를 가지고 우리가 함께 행동한다면 짙고 긴 밤을 지나 반드시 기다리던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2024년 봄, 대한민국에 비로소 새벽이 오고 해가 뜨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태원참사 희생자 유연주의 언니 유정이 청년들에게 호소합니다.
지겨운 절망을 넘어, 내일을 위해 투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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