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변호사 합격률 50% 시대의 그늘

(1)그 많은 여성 변호사 어디 갔나

유설희·이혜리·윤지원 기자

로펌은 채용 꺼리고…대형 형사소송 안 맡기고…

로펌 성평등 실태

[여성 변호사 합격률 50% 시대의 그늘](1)그 많은 여성 변호사 어디 갔나

“어디서는 여자는 감정적이라 변호사로 실격이라 하고 다른 데선 수석한 여자면 드셀 게 뻔하다고 직장 동료로 실격이래요. 둘째는 언제 갖느냐는 질문도 받았어요. 애들 챙기기 바빠서 되겠느냐는 곳도 있었죠.”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한 대사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졸업 이후 13번째 면접 때 퇴짜를 맞으며 로펌 대표에게 이 말을 건넨다. 긴즈버그는 1959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하고도 로펌에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여자 변호사는 (로스쿨을) 졸업하면 순식간에 2등 시민이 됩니다. 남자 변호사와 똑같이 공부하고도 임신, 육아에 발목이 잡히죠. 주변에 아이 2명 이상 낳은 여자 변호사가 몇이나 있는가 보세요.”

경향신문 기획취재에 응한 한 여성 변호사의 말이다. 영화 속 긴즈버그의 대사와 겹친다. 2019년 한국 변호사업계 풍경은 1950년대 후반의 미국과 다르지 않다.

여성 변호사들은 채용 단계부터 결혼·출산·육아에 따른 부담과 편견, 차별에 시달린다고 호소한다. 좋은 성적으로 로스쿨을 졸업해 로펌에 취업해도 승진과 업무 배정에서 뒷전으로 밀린다. 술자리로 불려가 ‘로펌의 꽃’ 취급을 받으며 시중들기 일쑤다. 치마를 입고, 단발머리를 하라는 강요도 받는다. 출산휴가도 못 쓴 채 장시간 노동을 버텨낸다. 남성 변호사들이 구축한 네트워크와 편견 때문에 여성 변호사들은 조직에서, 로펌 업계에서 타자화·주변화된다. 경향신문이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7일까지 여성 변호사 48명을 대상으로 한 성평등 조사에서 이 같은 문제와 실태는 뚜렷하게 드러났다.

“로스쿨에서 만난 똑똑하고 실력 있던 그 많은 여성은 다 어디에 가 있는가.” 설문에 참여한 한 변호사의 말이다. 조사에 참여한 48명 중 42명(87.5%)이 “로펌은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변호사시험 합격자 중 여성 비율은 44.7%다. 대한변호사협회 통계를 보면 지난해 신규 변호사 등록자 중 여성 비율은 41.1%다. 2009년(27.7%)보다 13.4%포인트 증가했다. ‘여성 변호사 7000명 시대’의 성평등 실현은 아득해 보인다.

고학력·고소득 전문직일수록 성차별이 적을 것이라는 인식은 통념이다. 로펌의 성차별은 더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여성 변호사의 성차별을 연구해온 권혜원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여성의 전문직종 진출이 증가하면서 성별 불평등이 완화된다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로는 전문직 노동시장에서 젠더 불평등의 관행이 지속된다”고 했다. 그는 ‘이상적인 변호사의 상’을 남성 변호사로 상정한 문제도 지적한다. “남성 변호사는 적극적이고 네트워킹에 강하다는 식의 편견이 여성 변호사를 주요 사건과 조직·네트워킹에서 배제하고 주변화한다”고 했다.

■ “가사사건 전담, 보조역할…출산 후에 와보니 자리 빼”

차별과 배제

결혼·출산·육아 등 이유
“막연한 차별 경험” 70%

경향신문은 여성 변호사들(48명)에게 업무 중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거나, 차별 대우를 받는 여성을 목격했다면 어떤 종류의 차별을 겪었냐고 물었다. 1위(68.1%·복수응답)는 ‘결혼·출산·육아 등 때문에 여성은 변호사 업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막연한 차별적 인식’이었다. 한 응답자는 “대표(변호사)들에게 여자랑 일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항상 듣는다”면서 “늘 여자 변호사라며 타자화(특정 존재를 자신들과 다른 속성을 지닌 존재로 부각시키는 것)된다”고 했다. 조사에는 5년 미만(59.6%), 5년~10년 미만(31.9%), 10년 이상(8.5%) 변호사들이 응했다. 소속 로펌 변호사 수는 30명 미만(69.6%), 100명 이상(21.7%) 순이다.

■ “형사사건 대신 가사사건”

이상적 변호사상 ‘남성’
네트워킹서 여성 배제

이들 중 51.1%가 업무상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29.8%가 “형사사건 대신 가사사건을 시키는 등 업무상 차별”을 당했다고 했다. 21.3%는 “남성 변호사와 달리 여성 변호사에게 보조적 역할을 맡기는 등 업무상 차별을 겪었다”고 했다. 한 변호사는 “파트너 변호사들이 대형 형사사건을 여성에게 맡기면 의뢰인들이 불안해한다는 이유로 남성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의뢰인과의 술자리가 불편할 것 같다는 이유로 여성 변호사에게 자문을 맡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ㄱ변호사는 “주로 기업들을 고객으로 두니까 술자리 등 (업무) 외적으로 상대해야 할 일이 많다”며 “여성 변호사는 (술접대 같은) 영업을 뛰어야 할 때 불리한 측면이 있다. 저도 그런 경험(자문 배제)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응답자는 “고객과의 술자리가 네트워킹에 중요한데 주로 남자 변호사들을 데려간다”고 했다. 사내에서도 배제된다. 한 응답자는 “남자 파트너 변호사들이 남자 어소변호사(Associate Lawyer·로펌에 고용돼 월급을 받는 주니어급 변호사)들을 데리고 룸살롱 등 유흥업소에 데려갔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고 했다.

■ “ ‘로펌의 꽃’이라며 얼굴마담”

로펌업계의 술자리는 이중적이다. 여성 변호사들은 ‘또 다른 술자리’엔 불려나간다. 차별 3위(27.7%)는 “술 시중을 들거나 ‘로펌의 꽃’이라며 얼굴마담 역할을 하게 하는 등 업무 외적인 역할에 대한 차별”이었다. 한 응답자는 “클라이언트와의 회식 자리에 얼굴마담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객에게 ‘우리 회사에서 제일 예쁜 분 모시고 왔다’며 나를 소개했다”고 말했다. 3대 로펌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ㄴ변호사는 “남자 변호사를 소개할 때는 무슨 자격증도 있고 엄청 유능한 친구라는 식의 실력을 앞세운 말을 해주고 나에게는 ‘우리 로펌의 꽃’이라고 소개했다”고 전했다.

천정아 변호사(법무법인 소헌)는 “어느 대기업을 접대해야 하는 자리가 있으면 예쁘고 어린 여성 변호사를 그 사건을 맡지 않을 건데도 데려가는 경우가 있다”며 “정작 중요한 얘기를 할 때는 (여성 변호사를 빼고) 자기들끼리 룸살롱을 가는 식이다. 대형 로펌에서도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ㄴ변호사는 파트너 변호사의 ‘술접대 에스코트’에 지쳐 퇴사했다. 문제의 파트너 변호사는 의뢰인 접대 자리만 있으면 ㄴ변호사를 대동했다고 한다. ㄴ변호사는 “파트너 변호사가 룸살롱 여종업원을 희롱하는 걸 옆에서 보며 육포를 찢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남자 변호사들을 업무랑 관련 없고 술만 먹는 자리에 분위기 띄우기용으로 데려가진 않는다”고 했다.

성폭력 사례도 나왔다. 한 응답자는 “점심식사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대표가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꽉 잡은 적이 있었다”며 “따로 형사고소를 진행하지 않았고, 구두사과를 받았지만 결국 퇴사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ㄷ변호사는 파트너 변호사의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퇴사했다. ㄷ변호사는 “너 내 세컨드 해라” “변호사 하기에는 아까운 몸매야” 같은 발언을 들었다.

여성 변호사를 판단하는 잣대는 ‘외모’다. “옷차림, 헤어스타일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겪었다는 답변도 적지 않았다. 한 응답자는 “치마를 왜 안 입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10대 로펌 중 한 곳에서 근무했던 한 남성 변호사는 “(재직 당시) 대표변호사가 여성 변호사들에게 단발로 자르라고 해 다들 머리를 잘랐다”고 전했다.

■ 왜 여성 변호사는 ‘주변화’되나

왜 로펌들은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할까. 응답자 중 절반(55.6%)은 “남성들이 가사·육아 부담이 적어서”라고 답했다. 한 응답자는 “출산휴가를 다녀오니 자리가 없어졌다”고 했다.

여성 변호사에게 ‘임신’은 곧 ‘경력단절’을 의미한다. 이들은 “출산하면 퇴사해 다시 재취업하는 구조”라고 입을 모았다. 천 변호사는 “여성 변호사는 출산휴가 3개월도 간신히 쓴다”면서 “여성 변호사가 이런 걸로 뒤처진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출산휴가) 전후 업무강도도 악물고 버텨낸다”고 말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육아휴직 후 다시 (로펌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서 이사는 “대형 로펌이나 사내 변호사들은 회사의 자금력이나 대체인력이 되니까 사정이 좀 낫다. 하지만 로펌 대부분은 30명도 안되는 영세한 중소 규모”라며 “이런 곳에서 (육아휴직을) 1~2년 배려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어 “현재 법조시장은 여성 변호사들이 끝까지 경력단절 없이 일하면서 일·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구조가 전혀 아니다”라며 “그래서 많은 여성 변호사들이 육아휴직 등 제도를 누리려고 사내 변호사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저임금 서비스 노동시장과 전문직 노동시장의 젠더 불평등 문제를 각각 연구했다. 그는 “콜센터, 청소용역회사 등은 중장년 여성들이 주로 취업하는 곳이라 결혼, 출산 여부 등을 묻는 ‘모성 프로파일링’이 작동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전문직 노동시장에서 (모성 프로파일링이) 과하게 작동한다”고 했다.

천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로펌들이 왜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할까요. 한마디로 일주일에 80시간씩 일시켜먹어야 하는데 못 시킨다 이거죠. 남자 변호사들은 밤새 주말 내내 일하는데, 여자 변호사는 애 본다고 밤 9~10시면 집에 들어가면 대표 입장에서 짜증나겠죠. 그런데 이게 개인의 문제일까요. 사회구조적 문제 아닐까요?”

■ “장시간 노동이 차별 재생산”

출산 땐 퇴사 후 재취업
일·가정 양립은 불가능
“장시간 노동, 차별 불러”

왜 전문직 노동시장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과하게 작동하는가. 여성 변호사들은 변호사업계의 장시간 노동 문화를 지적한다. 한 응답자는 “근로기준법이라도 지켜지면 좋겠다”고 했다. 다른 응답자는 “기본적으로 변호사 노동권 자체가 낮다. 이 부분도 함께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대한변협이 지난해 실태조사한 결과를 보면, 변호사 10명 중 8명(81.9%)은 시간 외 근무를 한다고 답했다. 변호사 10명 중 절반(54.1%)은 월 1회 이상 휴일근무를 한다고 답했다.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된 것이다.

권 교수는 “가사·육아를 여성이 1차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사회에서는 장시간 노동 규범 자체가 젠더 차별을 재생산한다”고 지적했다. “이건 노동시간의 문제지 젠더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현실은 여성이 가사·육아를 1차적으로 책임져야 하죠. 남성에게 면죄부를 줄 수밖에 없는 체제에서는 장시간 노동체제가 결과적으로 차별을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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