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사진신부들은 왜 신랑을 떠났나

김종목 기자

‘사진신부 이야기’로 본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거간꾼 ‘황금 나라’ 유인…사진 한 장에 하와이행

술·도박·무능 찌든 남편과 가부장 위계에 고난

집단 농장서 도시 노동으로…미국 사회서 생존 고투

하와이로 출발하기 전 촬영한 사진신부들. 가운데가 김차순으로 사진신부의 공동체, 영남부인회의 회장직을 역임했다. 하와이주립대학교 한국학센터 제공

하와이로 출발하기 전 촬영한 사진신부들. 가운데가 김차순으로 사진신부의 공동체, 영남부인회의 회장직을 역임했다. 하와이주립대학교 한국학센터 제공

천연희(1896∼1997)는 1915년 6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다. 19세 때다. 길찬록의 ‘사진신부’였다. 27살 연상의 ‘사진신랑’을 실제로 보고 혼인을 거부하려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억지로 결혼했다. ‘술 문제와 무능함’ 때문에 이혼한다. 두 번째 남편 박대성과도 헤어진다. 박대성이 딸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천연희는 딸도 아들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숙집 운영을 하다 호텔을 사들일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가 된 뒤 미군 출신 백인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호텔사업과 함께 카네이션 농장도 운영했다. 세 번째 결혼 때문에 한인 교회에 나갈 수 없었다. ‘백인 남성과 결혼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천연희는 남편 사후에도 계속 ‘백인 남성에게 몸을 판 여자’라는 모욕에 시달렸다.

백인 남성과 결혼한 여자라는 낙인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연구자 노선희는 최근 출간한 <사진신부 이야기>(북코리아)에서 문옥표, 이옥희 등이 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일조각)에 나온 이혼 사례 등을 인용한다. 이선주·로버타 장의 <하와이 한인사회의 성장사 1903~1940>(이화여대 출판부) 중 사진신부 김옥희가 한인 남편이 죽은 뒤 필리핀 남자와 사실혼 관계로 지냈다는 이유로 한인에게 외면당했다는 딸의 구술도 정리한다. 한인 사진신부란 1910~1924년까지 사진결혼을 통해 하와이 등 미국으로 결혼 이주한 한인 여성을 일컫는다. 윤인지 연구에 따르면 1115명이다. 연구 중 1000여 명 안팎의 통계가 많다. 이중 100여 명은 샌프란시스코 등 대륙으로 갔다고 본다. 이는 미국 이민국 자료 분석 추정치다. 홍윤정은 하와이 영사관 발행 여권을 추적해 600여 명이라고 했다.

1903~1924년 미국 이주 한인 통계. 윤인진 <코리안디아스포라>(고려대출판부) 중. 북코리아 제공

1903~1924년 미국 이주 한인 통계. 윤인진 <코리안디아스포라>(고려대출판부) 중. 북코리아 제공

노선희는 천연희 등 사례를 두고 “순혈주의적이고 남성 중심의 한인사회에서 한인 사진신부의 이민족과의 재혼과 그 자녀의 이민족 남성과의 결혼은 수용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이어 “여러 불이익에도 사진신부들이 국제결혼을 선택한 배경은 자신과 자식들의 생계와 자녀교육을 위한 안정적 가족 형성에 대한 욕구가 작용했다”고 말한다.

‘강인하게 살며 독립운동에도 나섰다’는 능동성과 주체성에 방점을 둔 인식과 규정은 ‘하와이 사진신부’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들의 일상은 더 고단했다. 삶의 주요 고비마다 놓인 선택은 복잡다단했다. 노선희는 인종, 민족, 젠더의 측면에서 “고집, 타협, 굴종, 일상적 저항 등이 포함되는 구불구불한 선택의 연속”이었던 ‘일상’을 중심으로 사진신부의 이주와 정착 과정, 그 삶을 들여다본다. 사진신부에 대한 차별과 배제, 억압도 서술의 한 축이다.

“너는 어떤 여자야? 남편 누구야?”

“너는 어떤 여자야? 남편 누구야? 어른한테 공손하게 말할 줄 몰라?” 사진신부 이영옥은 모금 활동 때 경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인 독신 남성에게 모욕을 당했다. 그는 “제가 열여섯 살에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온 이후로 제대로 된 예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저의 무지함과 무례함을 용서해주세요”라고 빌어야 했다. 이영옥은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인교회 목사 장봉의 해임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다는 이유로 이승만 지지자였던 남편에게 공개 석상에서 뺨을 맞았다.

하와이 한인사회에선 ‘시가’가 별로 없었다. 한인 남성 대부분은 홀로 이주했다. 가부장적 억압은 여전했다. 노선희는 “사진신부들보다 열다섯에서 스무 살가량 나이가 많았던 사진신랑들은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조선사회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여전히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시가를 둔 경우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1914년 이주한 송정윤의 신랑은 한인 1.5세대였는데 알코올 중독, 도박, 폭력 문제가 있었다. 송정윤은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시가 가족 생계까지 도맡았다. 아들이 미 대륙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어서야 남편과 이혼했다. 송정윤의 아들 알프레드 송은 어머니의 삶을 “희생.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박계율은 신랑을 만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조선 시가로 가 시집살이를 했다. 시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미국으로 갔다. 박계율의 오빠는 동생을 집안의 수치로 여겼다. 체벌도 당했다. 이계만은 먼 친척까지 찾아와 ‘우리 집안에서 창녀로 팔려 가는 여성이 생겨서는 안 된다’며 결혼과 미국행을 결사반대했다.

사진신랑 시가에서 시집살이하고 미국행

노선희는 ‘일상’ ‘타협’ ‘자기보호’를 주요 개념으로 사진신부 삶을 분석한다. 그는 상당수 한인 사진신부들이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려고 가부장제와 ‘타협’, 즉 결혼을 유지했다고 본다. 남편과의 나이차, 남편의 술과 도박 같은 문제 때문에 이혼으로 이어진 사례들도 적지 않다. 이혼이라는 일종의 저항을 선택할 때 기준도 자녀 등 ‘가족 보호’였다. 노선희는 “(호놀룰루 등) 도시 이주 이후 신부들은 신랑의 무책임과 무능함에 타협하기보다는 ‘이혼’을 선택함으로써 가족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에 따라 한인 사진신부의 가족관계는 모계 중심으로 형성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노선희는 가부장적 문화가 남은 집단농장을 벗어나 도시인 호놀룰루 노동시장으로 진입한 사진신부들에 주목한다. 한인은 주로 1920년을 기점으로 농장을 떠났다. 도시로 온 사진신부들은 여공, 가내 서비스, 세탁, 가내 보조업 등 ‘하층계급 유색인종 직업’에 종사했다. 노선희는 “인종, 계급, 젠더 등 미국 내 다층적 사회관계 속에서 한인 여성은 (백인 중심의 인종적 위계질서, 한인사회의 가부장제 등) 지배적 관계와 타협, 수용, 저항 등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점점 세탁소, 노점, 채소장사 등 더 큰 돈을 버는 경제활동을 벌이게 된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지로 간 사진신부들

사진신부가 간 곳은 하와이만이 아니었다. 책은 하와이를 거쳐 대륙으로 갔거나, 바로 대륙으로 이주한 사진신부들도 다룬다. 김명숙과 김신숙은 친자매로 각각 1916년, 1924년 대륙으로 갔다. 김신숙도 조선에서 3년 동안 시부모를 봉양한 뒤 이주했다. 몬태나의 한 농장에서 일하다 시카고의 한 고속도로 길가에서 채소 행상을 하며 돈을 벌었다.

1917년 하와이로 온 선우경신의 남편은 알코올 중독과 도박 문제가 있었다. 남편은 농장에 선우경신을 두고 떠나버렸다. 그녀는 살아남으려고 LA로 이주했다. 두 번째 남편과 함께 미 서부 도시 한포드에서 호텔을 운영했다.

노선희는 “농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들은 인종과 계급적 위계질서 속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고 다양한 경제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이들은 유색인종 출신 하층계급이 하던 직업에 종사하면서 인종 불평등과 젠더 불평등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별과 불평등은 대륙이 심했다. 하와이엔 아시아 사람 수가 많았지만, 대륙 도시에는 그 수가 적었다. 인종차별에 그대로 노출됐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사진신부 김석은은 “우리는 흑인처럼 미움을 받았다. 미국인은 우리를 ‘더러운 일본인’이라고 불렀다. … 나는 미국 음식을 좋아했지만 백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가는 건 무서웠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많은 사진신부들이 있었다. 살기에 가장 나쁜 곳이었다. 수치심을 느끼고 돌팔매질의 대상이 되는 게 일상이었다”고 했다.

1916년 18세의 나이로 시애틀로 이주한 사진신부 이엘렌의 가족은 대륙의 여러 지역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남편은 소작농이었는데, 돈을 벌어도 땅을 살 수 없었다. 미국의 토지법은 아시아인의 토지 소유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기댈 곳은 한인사회밖에 없었다. 강성학은 하와이 농장생활을 거쳐 이혼 후 자녀들과 함께 대륙으로 넘어왔다. 그는 “(농장에서) 우리 한인끼리 살았다. 그건(농장에서의 한인사회) 우리를 바깥세상의 인종차별로부터 보호해주었다”고 진술했다.

영어 배울 수 있다는 ‘인물 거간꾼’ 통해 사진결혼 결정

책은 하와이 사진신부 연구 결과를 망라한다. 한인 이민사의 여러 측면도 함께 들여다본다. 그중 하나가 학계나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인물 거간꾼’이다. 많은 사진신부가 인물 거간꾼을 통해 하와이로 갔다. 이 사진결혼 중개인들은 미국에 가서 영어 공부도 하고 학교도 무료로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로 어린 여성들을 유인했다. 당시 사진신부들은 가부장제 탈출과 신식 교육을 갈구했다. 김명숙은 “미국은 ‘황금으로 된 나라’라고 들었다”고 했다. 여덟 번째 아이를 낳을 때 남편이 죽었다. 학교엔 가지 못했다. 대공황 시기에도 여덟 명의 자녀를 혼자 키웠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재현한 하와이 한인여성의 일상. 노선희 제공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재현한 하와이 한인여성의 일상. 노선희 제공

책은 신성려 연구 자료도 인용한다. 신성려가 인터뷰한 사진신부의 구술자료에 따르면 50%(9명)는 영어를 포함한 미국 교육을 경험하려고 사진결혼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교육을 경험한 사례는 22%(4명)였다.

책은 사진신부 이민사의 여러 고비를 들춰본다. 태평양전쟁 시기 하와이나 대륙의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오해되는 것을 피하려고 ‘나는 한국인’이라는 명찰을 차고 다녀야 했다. 태평양전쟁은 한인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간 사진신부 강경수는 1942년 수용소로 강제이주된 일본인 가족이 남겨둔 목욕탕을 사들여 큰돈을 벌었다. 일본인 인구 비중이 높던 하와이에서 한인 1.5세대와 2세대들이 전쟁 이후 군부대 일자리 등을 얻은 사례가 많다.

한인 1.5세, 2세의 태평양전쟁 참여 의미는

태평양전쟁 시기 한인 2세들의 참전도 분석한다. “미주 한인의 참전은 한·일관계에서 비롯된 ‘피식민지민-식민지민’이라는 정치적 맥락 외에도 자신과 가족의 보호를 위한 미국 시민권의 획득, 미국 내 안정적 지위 확보 등 더욱 복잡한 맥락들이 얽혀 있었다. 한인은 일본인이라는 오해를 벗고 아시아인이라는 인종차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미국인’으로 인정받고자 했다”고 말한다. 즉 “한인 2세대의 태평양전쟁 참전은 미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의 주류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했던 미국 내 유색인종 소수자 집단의 선택”이었다.

책은 17세기 초 ‘담배신부’ ‘제임스타운 부인’ 등으로 불린 우편주문신부의 역사도 다룬다. 19세기엔 남부 유럽과 동유럽 출신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갔다.

‘아시아 여성 이민자’라는 맥락에서 19세기 후반 성차별과 인종주의도 살펴본다. 노선희는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문제를 과장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있다. 백인 지도자들은 위생 문제와 성병 문제를 결합하여 백인 남성의 공포심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미국의학협회는 “중국인 이민자는 자체적으로 내성이 있으나 백인에게 노출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균의 소지자”라고 주장했다. 노선희는 “미국 정치인들과 시민단체의 연합으로 아시아 여성을 매개로 한 성병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1875년 페이지법(미국 최초의 이민제한법)이 제정됐다”고 했다.

1920년 촬영한 호놀룰루 한인 감리교 부인전도회 .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1920년 촬영한 호놀룰루 한인 감리교 부인전도회 .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미국 백인 노동자들은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미 서부에서 중국인에 대한 배척 감정이 노동단체와 시민단체의 조직적 활동을 통해 고조됐다. 1882년 미국 연방법 최초로 특정 국적을 차별하는 중국인 배척법이 제정됐다. 백인 농장주들은 저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일본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1885~189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한 일본인 노동자들은 대략 3만명이다. 이들은 중국인 노동자들과 달리 부당한 처우에 반발했다. 노조를 결성해 여러 차례 파업했다. 초기 한인 노동자와 사진신부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맞선 파업 파괴자”에 동원된 셈이다. 농장주들은 일본인 노동자를 견제할 목적으로 한인 노동자 고용에 관심을 보였다. 1903~1905년 7226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노선희는 “일부 독신 남성들은 알코올, 아편, 도박 문제가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이나 다툼이 살인으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한인사회는 남성 독신자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1910년부터 사진 교환을 통해 사진신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백인 농장주들은 한인 노동자들이 혼인하면 임시체류자가 아닌 농장 노동자로 정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한다. 1910~1924년 1000여명의 사진신부들이 하와이나 대륙으로 이주했다.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으로 이주했다. 노선희는 일본 정부의 여권 발급을 두고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가 기대한 효과는 한인사회의 안정화를 통해 한인의 독립운동 참여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미주 한인사회의 반일 정서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고 했다.

노선희는 사진신부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자신과 가족의 안정적인 정착과 생존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진결혼을 통한 미국으로의 이주, 집단농장 생활에의 적응, 도시로의 이주와 정착, 태평양전쟁 시기 등을 거치면서 그녀들은 농장과 한인사회에서의 가부장제와 타협, 미국 내 도시의 주변화된 노동시장에서 경쟁과 생존, 지배적-인종적 관계에서 인정받기 위한 실천 등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생존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와이 사진신부들은 왜 신랑을 떠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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