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친화적인 남성중심 방송환경…“이게 신선함이야?”

위근우 | 칼럼니스트

허재 예능 대세론…‘남성 카르텔’ 문화의 불편함

허재 전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MBC <라디오스타>(사진)를 비롯해 각종 인기 예능프로그램을 종횡무진 누비며 새로운 ‘예능 대세’로 떠올랐다. 농구대통령으로 통하던 그가 예능계에서 맡은 새 포지션은 ‘형님’이다.

허재 전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MBC <라디오스타>(사진)를 비롯해 각종 인기 예능프로그램을 종횡무진 누비며 새로운 ‘예능 대세’로 떠올랐다. 농구대통령으로 통하던 그가 예능계에서 맡은 새 포지션은 ‘형님’이다.

축구 예능 ‘뭉쳐야 찬다’ 출연하며
허술함·직설적 표현으로 주목
지난 한 달 각종 예능 ‘종횡무진’

요즘 허재 전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바쁘다. 지난 6월부터 한국 스포츠 전설들이 모여 축구를 배우는 JTBC 예능 <뭉쳐야 찬다>에 출연하며 의외로 허술한 모습과 직설적인 감정 표현으로 주목받은 그는, 지난 한 달여 동안 같은 채널의 <냉장고를 부탁해>와 MBC <라디오스타>, SBS <집사부일체>, KBS2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까지 종횡무진 출연하며 소위 ‘예능 대세’로 떠올랐다. 대세뿐 아니라 예능 늦둥이, 예능 치트키, 예능 대통령 등 연예 기사에서 그를 수식하는 표현도 늘어나고 있다. 대체 무엇이 그를 대세로 만드는가.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아이콘이었던 그가 <뭉쳐야 찬다>에서 축구공을 엉뚱한 곳에 차거나 골키퍼 포지션에서 백패스 받은 공을 손으로 잡는 초보적 실수를 하는 게 웃기긴 하다. 그가 예능에 출연할 때마다 종종 소환되는 “이게 불낙(블로킹)이야?”라는 판정 항의 장면이 유명한 인터넷 밈(meme)인 것도 사실이다. 타 분야 스타 출신이자 유명인으로서 캐릭터 잡기에 유리한 면도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안정환과 서장훈이 예능인으로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후 어느 정도 입담이 되는 스포츠 스타 출신에 대한 방송가의 기대가 올라가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방송에서 드러난 허재의 예능인으로서의 가장 큰 자산은 ‘형님’이란 포지션이다.

형님 말 받아주는 남성 예능인들
형님에 호의적인 남성 시청자들
이미 유리한 출발점에 서 있는 셈

예능에서의 ‘형님’ 포지션이란 다음과 같다. <뭉쳐야 찬다>에서 감독 안정환의 지시를 놓치기 일쑤지만 태도 논란에 휩싸이기는커녕 그 자체로 웃음 포인트가 될 수 있고,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오세득 셰프의 작은 부상에 대해 엄살이라고 핀잔을 줄 수 있으며, <라디오스타>에 함께 게스트로 나온 연예계 34년차 박중훈과 오랜 친분과 술자리 에피소드로 티격태격할 수 있는 그런 포지션. 기본적으로 ‘형님’에게 한 수 접어주고 말을 받아주는 남성 예능인들, 그리고 역시 ‘형님’에게 기본적으로 호의적인 남성 시청자들의 반응을 통해 허재는 빠르게 예능 유망주 취급을 받고 또한 예능인으로서 잦은 기회를 얻는다. 허재가 예능 신인으로서 특별히 과대평가됐다거나, 흔한 꼰대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스스로 예능 신인으로서 “농구 경기로 비유하면 이제 운동화 끈을 묶는 수준인”(<냉장고를 부탁해>) 지금의 위치라는 것이 사실 이미 굉장히 유리한 출발점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형님’에 친화적인 남성중심적 방송 환경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정확한 수식은 예능 금수저일지도 모르겠다.

<라디오스타>에서 허재와 박중훈이 졸업한 용산고등학교에 대한 추억과 자부심이 MC 윤종신의 맞장구와 함께 일종의 공감 코드로 활용되는 것을 보라. 비슷한 연배의 남성들끼리 공유하는 추억은 별다른 추가 설명과 맥락 없이도 토크쇼의 주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워너원처럼 ‘핫한’ 게스트가 나와도 자기들끼리의 사담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던 KBS2 <해피투게더 3>의 ‘조동아리’가 그러했듯 이러한 ‘아재 예능’이 방송계의 주류인 지는 오래다. 중요한 건 앞서 말한 ‘형님’ 친화적 문화, 형·동생 호칭을 트는 관계에 특별한 의미와 끈끈함을 부여하는 문화가 지난 수년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는 ‘아재 예능’ 카르텔의 정서적 고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라디오스타>에서 게스트로 나온 허재와 박중훈, 노브레인의 이성우 등을 중심으로 쉬지 않고 술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 건 그래서 상징적이다. 박중훈과 술을 밤새 마신 다음 날 허재가 농구 경기에서 맹활약한 이야기, 김구라가 과거 MBC <사남일녀>에서 4박5일 동안 녹화 끝날 때마다 서장훈, 박중훈, 김민종과 술 마신 이야기, 이성우와 술을 마시던 박중훈이 “이제부턴 너랑 나랑은 형제다”라고 했다던 이야기. 이 사적 친분들이 어떤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에서 다시 연결됐는지 떠올려 본다면, 이 토크는 사실 술자리와 형·동생 사이로 묶어지는 남성 카르텔 문화에 대한 일종의 자백인 셈이다.

이러한 ‘형님’에 대한 의리와 아우에 대한 사랑을 중심에 둔 남성 카르텔 문화는 사실 사회적으로 꽤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이나리 헤이조이스 대표는 지난 6월(마침 <뭉쳐야 찬다>가 시작하던 시기)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술과 담배, 골프 등 중장년 남성들에게는 무엇을 함께하면서 뭉치는 문화가 있어요. 이것들을 함께하지 못하면 문화 속에 포함될 수 없는 거죠. 대다수의 여성들이 배제됐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에요. 저도 폭탄주를 한 잔이라도 더 먹어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그런 그조차 “남성들의 ‘형·동생 문화’ 앞에서는 또다시 배제”당했다고 술회하는 것이 한국의 남성 중심 네트워크 문화다. 이것은 우선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 중심적 권력과 관계망을 유지시키는 통치술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불공정하다. 예능의 경우 본인의 리듬을 찾고 소위 입이 트이기까지 꽤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뭉쳐야 찬다>부터 <냉장고를 부탁해> <라디오스타>까지 이어지는 허재의 회식에 대한 집착과 ‘회식 요정’ 캐릭터를 마냥 웃으며 볼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술로 친분 쌓는 걸 좋아하는 ‘형님’일수록 비슷한 관습을 공유하는 남성 또래 집단에 안착하기 훨씬 쉽다. 동시대 남초 문화를 대변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제목을 인용하자면, ‘아는 형님’의 ‘아는 형님’이면 그냥 ‘아는 형님’이 된다.

형·동생 트는 과정에 의미 부여
여성은 배제된 관계의 매개체 ‘술’
‘회식 요정’ 별칭 웃을 수만은 없다

[위근우의 리플레이]‘형님’ 친화적인 남성중심 방송환경…“이게 신선함이야?”

이미 불공정한 방식이지만, ‘아는 형님’ 중심으로 뭉쳐진 의리 카르텔은 그 내부에서부터도 필연적으로 망가진다. <라디오스타>에서 김구라가 다정한 ‘형님’임을 강조하던 이성우는, 김구라가 과거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비하 발언 때문에 방송에서 하차했던 시기 KBS2 <불후의 명곡>에서 ‘친구야’를 부르며 마지막에 김구라 사진을 띄우고 “보고 싶은 그 형”이라 외쳤던 걸 미담으로 소개했다. 김구라가 “올해 최고의 퍼포먼스”라는 문자를 보냈다고도 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형님’과의 의리와 끈끈함을 유지하겠다면 그건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아름다운 경험처럼 소개한다면, 심지어 당일 방송에서 노브레인이 욱일기를 찢은 퍼포먼스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두 에피소드 사이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관계망의 합리적 소통 능력은 망가졌다고 보는 게 온당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필연적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동등한 개인 대 개인을 형님·아우로 녹여서 한데 뭉쳐버린 관계가 건강할 리 없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계망이 여전히 메인스트림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 예능이 건강하길 기대하기도 어렵다. 남성 중심 카르텔과 형님 문화라는 근본적인 부정의를 해체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쉬지 않고 타 분야에서 예능 유망주를 수혈하고 밀어준다 해도 결국 똑같은 정서와 똑같은 문제가 반복될 뿐이다. 그러니 허재의 오랜 유행어를 빌려 질문해보련다. 이게 신선함이야? 이게 신선함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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