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이 떠난 마을 ‘숨은 보석’들이 뭉쳤다···동네가 달라졌다

허남설 기자
서울 중구 다산동 ‘우리동네 관리사무소’ 현장지원팀장 김승씨(오른쪽 두번째)와 동주민센터 박은정 동정부2팀장(오른쪽)이 ‘골목분양제’ 현장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산동 주민센터 제공

서울 중구 다산동 ‘우리동네 관리사무소’ 현장지원팀장 김승씨(오른쪽 두번째)와 동주민센터 박은정 동정부2팀장(오른쪽)이 ‘골목분양제’ 현장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산동 주민센터 제공

서울 남산자락에 자리한 다산동 성곽마을. 산능선에 우뚝 선 특급호텔과 그 주변 서울성곽길에서 굽어보이는 동네다. 여느 산동네가 그렇듯 다산동에도 3~4층짜리 다가구·다세대 주택이 빼곡하다. 다산동 주민 김승씨(58)는 요즘 이 가파른 동네를 오전과 오후 하루 두차례 오르내린다. 김씨 표현을 빌리면 “두 다리에 5단 기어를 넣고서” 비탈과 계단이 어지럽게 얽힌 다산동 골목을 샅샅이 훑는다.

김씨는 지난 6개월 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요 길목마다 ‘골목대장’을 임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말이 임명이지, 실은 “형님, 여기 오래 사셨으니 이 근방을 좀 책임져 주쇼”라며 읍소하는 일에 가깝다. 골목대장의 임무는 청소와 ‘잔소리’다. 누군가 휙 버린 담배꽁초를 줍는가 하면, 쓰레기 봉투를 아무렇게 툭 던져놓고 가는 주민에게 배출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다산동 토박이 이계용씨(72)와 ‘신토불이 J마트’ 점주 유종성씨(64) 등 동네에서 수십 년 산 주민들이 맡은 역할이다. 6호선 버티고개역과 통하는 골목에선 ‘최고령 골목대장’ 박경희씨(81)를 만날 수 있다.

주민들은 이 골목 청소 체계를 ‘골목분양제’라고 부른다. 골목분양제는 중구가 다산동 같은 노후 저층주거지에도 아파트 관리사무소 역할을 하는 거점을 만들기 위해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우리동네 관리사무소(우동소)’ 사업 중 하나다. ‘골목 수분양자’를 섭외하는 김씨는 다산동 우동소의 현장지원팀장이다.

서울 중구 약수동 남산타운아파트 단지 너머로 보이는 남산자락 다산동 성곽마을 전경. 서울경관아카이브

서울 중구 약수동 남산타운아파트 단지 너머로 보이는 남산자락 다산동 성곽마을 전경. 서울경관아카이브

김씨는 다산동에 40년 가까이 살았다. 지난 19~20일 기자와 동행해 다산동을 둘러본 김씨는 “이 곳엔 아파트가 없고 언덕에 골목도 좁다 보니까 40~50년 동안 산 연로한 분들이 많다”면서 “젊은이들은 맞벌이를 해서 아침·저녁시간 외엔 볼 수가 없어 청소 문제가 심각했다”고 말했다. 주민공동시설 ‘담소정’에서 만난 이계용씨는 “우리집 대문 안만 쓸고 대문 앞은 쓸지 않는 게 요즘 세태”라면서 “이웃끼리 식구 같이 지내도 그건 변하지 않더라”라고 했다.

청소 문제의 핵심은 비좁고 후미진 골목이었다. 몇몇 주민들이 머리를 맞댔다. 청소차가 가파르거나 막다른 길로 들어가지 못하니 집 앞 쓰레기가 제때 수거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아침에 내놓은 쓰레기는 청소차가 들르는 밤까지 종일 냄새를 풍겼다. 그러면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 쓰레기가 산을 이뤘다. 골목이 복잡한 다산동엔 이런 지점이 무수히 많았다.

해결책은 단순했다. ‘청소차가 오기 전인 밤 시간대에 집 앞에 쓰레기를 내놓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다만 주민들의 오랜 습관을 바꾸려면 곳곳에 ‘감시자’가 필요했다. 이미 김씨와 이씨처럼 자발적으로 청소를 도맡던 주민들이 제격이었다. 다산동 주민센터 박은정 동정부2팀장은 이 주민들을 “숨은 보석”이라고 불렀다. 동주민센터가 주민들에게 청소용품과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다. 다산동 우동소는 지난 5월부터 주민들에게 감시자 자격을 부여하고 이들을 하나의 감시망으로 엮는 골목분양제를 도입했다.

다산동 주민들이 수시로 버린 쓰레기 봉투가 쌓인 골목(왼쪽). 다산동 ‘우리동네 관리사무소’가 ‘골목분양제’를 실시한 후 골목이 깨끗해졌다(오른쪽). 다산동 주민센터 제공

다산동 주민들이 수시로 버린 쓰레기 봉투가 쌓인 골목(왼쪽). 다산동 ‘우리동네 관리사무소’가 ‘골목분양제’를 실시한 후 골목이 깨끗해졌다(오른쪽). 다산동 주민센터 제공

골목분양제는 다산동에서 ‘참여 네트워크’로서 작동한다. 담소정 앞 골목분양제에 참여하는 박정난씨(56)는 “누군가 청소를 하고 있으면 처음엔 살짝 미안해 하면서 지나쳤다가도, 두번째 보면 인사라도 나누게 되고, 나중엔 ‘쉬는 날 나도 동참할까?’ 생각하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참여자가 한두명씩 늘면서 현재 26명이 골목 10곳을 관리 중이다. 통반장은 2명뿐, 나머지는 모두 주부 등 평범한 이웃들이다.

이 네트워크는 청소뿐만 아니라 복지와 치안 체계로도 기능할 수 있다. 다산동에는 독거노인, 장애인, 외국인 등 자칫 소외되기 쉬운 주민 비율이 2020년 기준 서울 전체 평균치를 웃돈다. 이런 주민들은 골목분양제처럼 마을 여기저기에 뿌리 내린 네트워크를 통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산동 우동소는 최근 이 같은 주거취약계층 가정을 방문해 냉·난방 점검, 해충 방역, 전구·문고리·방충망 교체 등 간단한 집수리를 제공하는 ‘찾아가는 싹쓰리 홈케어’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방문을 겸해 이들의 안부를 묻는 것 또한 목적이다. 위험지역과 등굣길 순찰, 화장실 불법촬영 방지 작업도 한다. 취약 지점도 주민 네트워크 속에서 보다 쉽게 발견될 수 있다. 우동소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동네 관리사무소’가 지난 20일 기초수급자인 노인 부부 가정을 방문해 방역과 청소를 하고 있다. 다산동 주민센터 제공

‘우리동네 관리사무소’가 지난 20일 기초수급자인 노인 부부 가정을 방문해 방역과 청소를 하고 있다. 다산동 주민센터 제공

다산동은 20년 이상 된 건축물이 70%가 넘는 서울시내 대표적 노후 주거지로 꼽힌다. 일부 지역은 2010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다가 2015년 해제됐다. 성곽길 주변 동네이기 때문에 건축물 높이 제한이 있어 재개발사업을 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시는 지난해 다산동 일대를 도시재생 희망지로 선정했다. 김승씨는 기자와 재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재개발이 언제 될지 알 수도 없지만, 지금도 주민들이 조금만 신경쓰면 바꿀 수 있는 게 많다”라고 말했다. 다산동 우동소는 이미 재생의 싹을 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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