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노동자 ILO 협약 체결 순간 터진 환호

김유진 | 국제NGO활동가·하버드대 공공정책학 석사

차분하던 회의장이 조금씩 들썩였다. 제100차 국제노동기구(ILO) 총회가 개막한 지난 1일부터 회의장 왼쪽 한편을 지켜온 가사노동자들과 NGO 활동가들 사이에서 흥분이 감지됐다. 의장이 의사봉을 세 번 내리쳤다. ‘와’하는 환호와 함께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노동자들의 노동자’로 일컬어지는 가사노동자들에 관한 ILO 협약이 마침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ILO 추산에 따르면 전 세계 가사노동자는 약 1억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3.6%에 해당한다. 이들 중 대다수는 여성으로 고령화, 맞벌이 가정의 증가, 경기침체 등과 맞물려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돌봄노동의 세계화’로 대표되는 개발도상국 이주여성이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수 또한 증가 추세다.

[경향마당]가사노동자 ILO 협약 체결 순간 터진 환호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상당수 국가에서 가사노동자는 노동법과 기본적 사회보장 제도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저임금과 무제한적 노동시간에 시달릴 뿐 아니라 노예계약과 고용주·중개업체의 횡포에도 빈번하게 노출되어 왔다.

지난 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ILO 총회에서 통과된 ILO 가사노동자 협약은 이처럼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가사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책임을 다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지난해 총회에서 구속력을 가지는 협약과 각국의 실정 차이를 고려한 권고를 함께 마련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2년 만에 공식 협약 채택에 이르렀다.

가사노동자에 대한 첫 국제노동기준인 ILO 가사노동자 협약의 핵심 내용은 크게 △노동자성 인정 △차별대우 금지 △정부 정책 구축으로 요약된다. 협약 10조에 따르면 가사노동자들은 노동시간과 초과근무, 법정 휴가 등에서 여타 노동자와 동등하게 취급된다. 단체교섭권 등 결사의 자유 보장(3조), 산업재해 보호와 건강권 보장(13조), 사회보장제도 및 모성보호(14조) 등에서도 다른 노동자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된다.

또 근로계약 체결시점부터 업무 성격, 급여, 초과수당, 노동시간, 휴가 등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아야 한다. 노동 감독이나 진정절차 마련 등과 같이 정부 차원의 체계적 보호정책을 주문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번 총회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된 쟁점 중 하나는 ‘과연 가사노동자의 특수성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 여부였다. 특히 노동시간에 대한 규제나 노동감독 허용 등을 두고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회의가 길어지면서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고비도 있었다. ‘보장한다’와 ‘보장하는 것을 고려한다’는 문구를 놓고 소모적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적 대화의 원칙에 따라 이견을 좁히려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뤘다. 정부 대표단 중에서는 미국과 호주를 필두로, 아프리카(남아공)와 남미(브라질) 국가들이 앞장서서 가사노동자 보호 강화를 촉구했다. 유럽연합(EU)은 비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협약 내용에서 최대한 유연성을 확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반면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은 협상 무대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총회에서 만난 세계 각지의 가사노동자들은 한마음으로 협약의 탄생을 반겼다. 열다섯 살 때부터 가사노동자로 일해왔다는 네팔 가사노동자독립노조 위원장 소누 다누와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기쁘다”고 말했다. 비공식부문의 여성노동 문제를 다루는 국제NGO인 WIEGO의 마사 첸은 “글로벌한 사회운동 중에서 3년 만에 국제기준 제정까지 이어진 사례가 없다”며 “노동자들의 강한 열망과 단결된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국제가사노동자네트워크(IDWN)는 곧바로 비준 캠페인에 돌입할 예정이다. IDWN 공동의장인 머틸 위트부이(남아공)는 “가사노동자이던 내가 45년 전 여성들을 조직화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면서도 “모든 가사노동자들이 해방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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