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은 서울의 거리”… ‘싸우는 장애인’이 남긴 말들

이혜인 기자

유언을 만난 세계

정창조·강혜민·최예륜·홍은전·김윤영·박희정·홍세미 지음|비마이너 기획|오월의봄|344쪽|1만8000원

1995년 3월 11일 최정환 열사 분신에 대해 장애인과 노점상들이 서초구청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5년 3월 11일 최정환 열사 분신에 대해 장애인과 노점상들이 서초구청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4년 9월19일. 33세 청년이 서울시장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지하 셋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음독자살’로 결론지었다. 며칠 후 청년의 사연이 조선일보에 실렸다. 청년의 이름은 김순석. 그는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겪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인해 다섯 살 때부터 한쪽 다리를 절었지만, 뛰어난 손재주와 타고난 성실함을 가지고 있었다. 열아홉 살에 서울로 올라와 금은세공 기술을 익히며 실력을 인정받아 작은 공장의 공장장까지 맡았다.

1980년 당한 교통사고로 그의 인생이 뒤집혔다. 두 다리에 철심이 박히고,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장애를 갖게 됐다. 두 손과 뛰어난 세공 기술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거래처에서는 ‘사지 멀쩡하지 않은 사람의 제품’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10~20%씩 깎거나, 거래대금을 계속 떼먹었다. 보도블록의 높은 턱 때문에 인도에 오르지 못하고 차도를 따라 이동하던 어느 날, 김씨는 도로교통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체포돼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그가 편지지에 쓴 유서에는 세상의 부당함에 저항하는 마음이 꾹꾹 담겨 있다.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잡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 택시를 잡으려고 온종일을 발버둥치다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읍니다. (…) 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져보게 해주었읍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놓았읍니다.”

우리는 이 청년처럼 ‘싸우는 장애인’의 이야기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장애인 투쟁 하면 지하철 역사에서 이동권 보장 요구 시위를 하거나, 공공기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이 같은 피상적 기억은 비장애인들의 무관심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김순석과 같은 이야기가 그저 ‘장애인 음독자살’로 보도되며 역사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기 때문에 강화된다. “살아서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죽어서 바깥으로 내몰린다. ‘열사’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호명되는 이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기록은 변방을 피해간다. 죽은 자들이 머무는 거처, 즉 역사에는 가난한 장애인들을 위한 장소가 없다.” 정창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간사의 말이다.

주류 운동권에서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1980~2000년대 장애인들이 겪은 모순과 차별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장애해방열사들. ①이덕인, ②최정환, ③우동민, 박흥수(④ 오른쪽), 정태수(④사진 왼쪽과 ⑤), ⑥박기연, ⑦김순석, ⑧최옥란 열사.<br />이덕인열사공대위·장애해방열사_단·비마이너·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인천지부·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제공

주류 운동권에서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1980~2000년대 장애인들이 겪은 모순과 차별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장애해방열사들. ①이덕인, ②최정환, ③우동민, 박흥수(④ 오른쪽), 정태수(④사진 왼쪽과 ⑤), ⑥박기연, ⑦김순석, ⑧최옥란 열사.
이덕인열사공대위·장애해방열사_단·비마이너·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인천지부·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제공

진보적 장애인언론 비마이너가 기획한 <유언을 만난 세계>는 주류 운동권의 열사들과 달리 주목받지 못하는 장애인운동 열사들의 이야기를 드러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정창조 등 일곱 명의 기록 활동가가 ‘싸우는 장애인’들의 기록을 뒤지고, 남겨진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써내려간 기사가 책으로 엮였다. 김순석, 최정환, 이덕인, 박흥수, 정태수, 최옥란, 박기연, 우동민 등 총 8인의 장애해방열사의 삶을 조명했다. 1980~2000년대 장애인들이 겪은 모순과 차별, 이에 끈질기게 저항한 장애해방운동의 장면들을 책에 담았다.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자 버블경제가 정점에 이르렀던 1990년대 초반에도 장애인들은 심각한 생계난을 겪었다. 정창조 간사는 “많은 장애인이 앵벌이로 생을 유지하고 있었다”며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의 생산 시스템과 괴리된 채 ‘기생적 소비’만을 이어가야 했다”고 말한다. 김순석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폭력이 만연해 있었고, 이를 막을 제도적 보호책은 전무했다. 정부는 1990년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정해 장애인 의무고용률 2%를 법으로 규정했으나 노동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세계화’의 기치를 강조하는 정부·여당은 기업 활동 규제 완화를 명목으로 내세워 의무고용률을 1%로 하향 조정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돈 없는 장애인들에게 노점은 스스로 벌어 먹고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스물한 살 때 당한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최정환(1958~1995)도 노점을 운영했다. 하지만 1994년 여름 강력한 단속을 당하던 중에 왼쪽 다리가 부러지면서 일을 하지 못해 사지에 내몰렸다. 1995년 3월8일 서초구청 단속반원들에게 장사 밑천인 스피커와 배터리를 또다시 빼앗기고 이를 되찾으러 찾아갔던 그는 공무원으로부터 ‘병신 새끼’라는 말을 듣고 돌아온다. 그날 저녁 최정환은 시너 1ℓ를 자신의 몸에 쏟아붓고 분신, 10여일 후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남긴 “복수해달라,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에서 복수는 생존권을 위한 투쟁의 의미일 것이다.

1995년 11월에는 인천 아암도에서 이덕인(1967~1995)의 죽음이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거리에서 노점상을 밀어내는 ‘노점, 노상적치물 정비 종합추진지침’을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11월24일 인천에서 군경, 소방, 용역 등 총 1253명이 동원돼 노점상 강제철거가 실시됐다. 노점상들은 철골과 합판으로 지어올린 망루에 올라 투쟁하며 버텼다. 망루 위에 있던 이덕인은 망루 밑으로 내려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흘 뒤 주검으로 발견됐는데, 당시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두 손목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경찰은 영안실에서 그의 시신을 탈취해 부검하고는 서둘러 사인을 익사로 발표했다. 이덕인의 죽음은 법정에서 단 한 번도 다뤄진 적이 없으며, 아직도 의문사로 남아 있다. 그의 이야기를 기록한 최예인씨는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소위 ‘86세대’가 ‘작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큰 정의’를 위해 나서는 개혁의 주체로 소환될 때, 그들과 동시대를 살다 간 가난한 장애인 청년은 개발과 발전, 진보의 역사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최옥란 열사의 유서. 국민기초생활법의 최저 생계비가 너무 낮게 책정된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담겨있다. “준호야 사랑한다. 꼭 너하고 사려고(살려고) 했는데 준호야 준호야 네가 보고싶구나”라고 적혀있다. 빈곤사회연대·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제공.

최옥란 열사의 유서. 국민기초생활법의 최저 생계비가 너무 낮게 책정된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담겨있다. “준호야 사랑한다. 꼭 너하고 사려고(살려고) 했는데 준호야 준호야 네가 보고싶구나”라고 적혀있다. 빈곤사회연대·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제공.

장애해방운동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열사 여덟 명 중 유일한 여성인 최옥란(1966~2002)은 한겨울 명동성당 앞에 깔개 하나를 놓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저소득 빈곤계층 단 한 명의 최저생계도 보장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최옥란은 어릴 때 열병을 앓고 뇌성마비를 갖게 됐다. 그는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이혼했는데, 경제적 능력이 있는 시부모와 상대적으로 경증의 장애를 가진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겼다. 경제적 자립을 통해 양육권을 찾기 위해 노점을 운영했지만, 2000년 10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시행되자 노점상을 포기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서 턱없이 낮게 책정한 최저생계비로 인해 생계난에 빠졌고, 같은 문제를 겪는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다 투쟁하게 됐다. 2002년 2월 새벽 음독 시도 후 결국 숨진 그의 유서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마지막 말이 담겨 있다.

“김대중 대통령께. 이제 내 나이 35세. 우여곡절이 많은 장애인입니다. 당신도 장애인이면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법이 나의 작은 꿈들을 다 잃게 했습니다. (…) 나의 주위 계신 동료 여러분께 부탁이 있습니다. 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오.”

그의 죽음을 회상하는 동료 조성남은 “그때 저희는 (수급비 보장 문제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요. 자기가 열심히 노점 해서 먹고살면 되지. 왜 수급비 문제를 제기하냐” 같은 인식이 있었다면서 “그런 문제제기를 (최옥란이) 벌써 17년 전에 했으니”라고 말한다.

이덕인의 죽음 이후 1997~2000년대 초반 장애인 기본권 투쟁의 동력이 약해지고, 장애인운동이 지각변동을 겪던 시기가 있었으나 투쟁은 계속됐다. 책에 언급된 장애인운동은 이동권, 노동권, 생존권, 인권 등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됐다. 박흥수(1958~2001), 정태수(1967~2002)와 함께 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과정 ‘싹틈’ 출신 ‘3인방’으로 꼽히며 운동을 함께했던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61)은 이렇게 말한다. “곁에 있던 이들을 떠나보내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몸에 흡수되고, 마음으로 전달되어 작동하던 힘은 ‘희망의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 장애인운동이 만든 성과들은 모두 나보다 앞서간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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