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가 만든 왜곡된 고아 모습…“남들도 저를 그렇게 볼까요?”

최미랑·김유진 기자

아름다운재단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캠페이너 손자영씨

아름다운재단의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캠페인 ‘열여덟 어른’의 캠페이너 손자영씨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최유진 PD yujinchoi@kyunghyang.com

아름다운재단의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캠페인 ‘열여덟 어른’의 캠페이너 손자영씨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최유진 PD yujinchoi@kyunghyang.com

손자영씨(24)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 어디서 ‘고아’ 얘기가 튀어나올지 몰라서다. 손씨는 돌이 갓 지난 때 보육원에 맡겨졌다. 만 18세에 ‘보호종료아동’이 되면서 시설을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단단한 마음으로 잘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그의 마음이 무너지는 때가 있다. 얼마 전 친구와 영화 <화차>를 볼 때도 그랬다. 영화는 성당 고아원에서 자란 주인공이 성인이 돼 살인을 하고 남의 신분으로 사는 얘기를 그린다. “영화 속에서 고아원이 나오는데 너무 불안한 거예요. 옆에 있는 친구도 날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까, 날 불편한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날 피하진 않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는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영화를 보다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이 왜 저렇게 됐을까’ 궁금해지면 어김없이 이런 대사가 나와요. ‘저 X, 고아라잖아.’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필요 없다는 듯요.”

손씨는 어릴 때부터 ‘보육원 아이’에 대한 선입견을 마주해야 했다. 같은 사설학원에 다녔던 보육원 아이들은 학원에서는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같은 도시락통에 반찬까지 같다 보니 들키지 않으려고 손씨는 화장실에 숨어 도시락을 먹었다.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원 친구들이 손씨를 놀렸다. “너 언덕 위 하얀집에 사는구나.” 다시는 시설에 산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로 결심했다. 보육원을 나와 취직한 뒤에도 ‘고아’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 가짜 프로필을 외우고 다녔다. 그는 “이런 삶이 반복될수록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고 말했다.

“꽤 괜찮은 관계가 돼서 ‘사실 나 보육원에서 자랐어’라고 얘기했을 때와 처음 만날 때부터 밝혔을 때 반응이 달라요. 친한 관계에서는 저를 나쁘게 보거나 동정의 눈으로 보지 않아요. 근데 처음부터 얘기를 하면 불쌍하게 바라보거나 외면하려고 하죠.” 몇해 전 그는 아르바이트하는 가게 사장에게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며칠 뒤 사장은 “오늘까지만 해. 사이트에 구인광고 올렸어”라고 했다. “제가 보육원에서 자라고 부모님이 안 계셔서 믿음이 안 가나보다 생각했어요.”

올 초 방영된 드라마에선 이런 대사가 나왔다. “부모에게 배운 게 없으니 저 모양이지, 고아들은 어떻게든 티가 나요.” 손씨는 “그런 대사들이 시설에 있는 아동들이나 나와 같은 보호종료아동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며 위축될까봐 걱정된다”며 “앞으로 세상에 나올 아동들이 자립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수많은 차별과 편견을 경험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미디어가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손씨는 아름다운재단의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캠페인 ‘열여덟 어른’에 당사자 캠페이너로 참여했다. 경향신문은 캠페이너인 손씨와 함께 드라마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고아’ 46명의 설정과 대사들을 분석했다.

결과를 살펴보니 고아는 주로 범죄자로 설정됐다. 46명 중 20명이 뺑소니범, 학교폭력 가해자(이하 KBS 드라마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 살인자(영화 <악인전>, KBS 드라마 <마스터-국수의 신>), 사채업자(영화 <경호원>), 사기꾼(SBS 드라마 <의문의 일승>) 등으로 묘사됐다. 손씨는 “등장인물이 이런 잘못을 하는데 왜 그런지 증명을 해보이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차원에서 고아라는 설정이 사용된다”고 말했다. “막장 드라마일수록 등장인물을 고아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영화 <악인전>은 극 중 살인마를 ‘살인을 저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사이코패스’라고 소개하죠. 극 중에서는 살인마에 대해 ‘보육원 출신’이라고 소개하는 대사를 넣어 개연성과 당위성을 부여해요.”

여성 캐릭터는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다.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의 문해랑(조우리)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에, 불륜을 저지르죠. SBS <애인있어요>의 강설리(박한별)도, MBC <봄이 오나 봄>의 김보미(이유리)란 인물도 마찬가지예요. 욕망덩어리에 남자를 성공의 도구쯤으로 여기고 집착하는 인물로 나와요. 보육원 출신에 대한 고정관념도, 여성에 대한 선입견도 동시에 느껴져 불편해요.”

그는 ‘고아’를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한 드라마도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고아로 묘사되는 여성 주인공 캐릭터들은 ‘캔디’예요. 어려워도 착하고 활발하죠. ‘고아면 그래도 착하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많이들 하잖아요. 근데 고아라면 ‘착하다’는 걸 장식품처럼 가져가야 하나요? 저는 착하지도 않고, 이 인물들처럼 다 내주면서 마냥 착하게 살고 싶지만도 않아요.”

손씨는 “다양한 사람이 살고, 다양한 것들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드라마나 영화는 여전히 편협하고 축소된 이미지로 ‘보호종료아동’을 묘사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드라마나 영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재미있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고아의 이미지도 강화하고 드러내요. 전혀 상관없는 기사에도 ‘부모 없는 애들이 저렇다’ ‘부모 없는 걸 티내지 마라’라는 댓글이 있는 거예요.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수백명이더라고요. ‘부모가 없다 = 배우지 못한 사람 =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이게 공식처럼 정해진 거 같아요.”

그는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저는 차별을 싫어하고 혐오를 혐오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노력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해요. 공동체를 원하고, 청소도 좋아하죠. 아, 떡볶이도 좋아해요. 자꾸 부모님의 존재를 묻는 사람은 싫어해요.”

매년 2600명의 보호종료아동들이 시설에서 나와 자립을 시작한다. 손씨는 “보호종료아동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청년들처럼 꿈이 있고 목표가 있다”며 “이들의 자립이 편견과 차별에 의해 움츠러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중매체에 나타난 고아를 향한 문제적 대사들

내 딸 금사월, MBC, 2015

내 딸 금사월, MBC, 2015

“근본도 없는 고아 주제에
어디서 금쪽 같은 내 아들을 꼬셔.”

이태원클라쓰, JTBC, 2020

이태원클라쓰, JTBC, 2020

“종졸에 전과자에 고아!”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 KBS, 2019~2020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 KBS, 2019~2020

“고아새끼라더니 아주 그냥 쓰레기구먼 쓰레기,
고아새끼들은 어떻게든 티가 나요 티가 나.”

나쁜사랑, MBC, 2019~2020

나쁜사랑, MBC, 2019~2020

“우리랑 한가족으로 살았으면서 어떻게 이럴수 있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던데 우리 호진이 앞길을 망치냐.
우리 집 희망이고 대들보인데 감히 네가!”

봄이 오나 봄, MBC, 2019

봄이 오나 봄, MBC, 2019

“근본이 없다…우리 진우 잡아먹으면 어떻게 하냐.”

부암동 복수자들, tvN, 2017

부암동 복수자들, tvN, 2017

“넌 나쁘고 모자란 애야. 그래서 버려진 거야.”

전설의 마녀, MBC, 2014~2015

전설의 마녀, MBC, 2014~2015

“너 같은 천출이 3년씩이나, 그것도 팔자에 없는
재벌가 며느리 행세를 했으면 군말 없이 견뎌야지!”

동백꽃 필무렵. KBS2. 2019

동백꽃 필무렵. KBS2. 2019

“고아니까 가정교육 못 받으면 도둑이 된대.
그래서 술집딸도 계속 거짓말을 하는거래.”


드라마 속 ‘고아의 공식’ 분석해보니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고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경향신문과 아름다운재단 손자영 캠페이너가 지난 18일 한국 영화와 드라마 36편에 등장하는 ‘고아’ 캐릭터 46명을 분석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20명이 폭행·사기·살인 등 ‘범죄’와 관련이 있었다. 이 중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로 묘사된 인물이 7명이었다. 이외에도 고아 캐릭터는 ‘복수’(16명), ‘배신과 음모’(13명), ‘누명’(8명) 등과 연관돼 있었다.

여성 인물들은 ‘고아’에 대한 편견과 ‘젠더 고정관념’이 반영된 캐릭터들이 많았다. ‘불륜’을 저지른 인물은 모두 5명이었는데 4명이 여성이었다. 사기를 당하거나, 성폭력 또는 학교폭력 피해자로 묘사된 인물 4명 모두 여성이었다. 갖은 어려움에도 활달하고 주변에 헌신하는 것으로 묘사된 ‘캔디’형 인물은 6명이었는데 모두 여성이었다.

부정적 키워드와 연관된 인물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공식’이라고 부를 만한 패턴이 있었다. ‘부모가 없다’는 결핍이 있어 뒤틀린 욕심과 야망을 갖게 되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예컨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MBC에서 방영된 <나쁜사랑>의 경우, 제작진은 등장인물 박상태(전진기 분)에 대해 ‘천애고아로 자라 거칠게 살아온 인물, 머리가 비상하고 판단력이 뛰어나지만 뭔가 가진 게 없고 비빌 데 없는 처지라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소개한다.

여성 인물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야망을 이루려 한다는 서사도 흔히 나타났다. 2017~2018년 방영된 SBS <해피시스터즈>는 ‘조화영’(반소영 분)이란 인물에 대해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몸을 실은 야망의 여자. 경제력이 빵빵한 유부남이나 ‘돌싱’을 유혹해서 폼 나게 품위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고 소개한다. 긍정적으로 묘사된 여성 캐릭터라 하더라도 수동적인 인물로 그린 경우가 많았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작품 안에서 선한 인물로 등장한다고 해도 결국 추구하는 서사가 ‘친부모를 만나서 행복을 찾는다’거나 ‘백마 탄 왕자를 만나 신분상승한다’는 설정이라면, 이는 역시 고아를 ‘자립하지 못하는 존재’ 또는 ‘결핍된 존재’로 보는 왜곡된 시각이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고아를 향한 문제적 대사도 눈에 띄었다. “근본도 없는 고아 주제에 어디서 금쪽같은 내 아들을 꼬셔.”(MBC <내 딸 금사월>), “우리랑 한 가족으로 살았으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던데 우리 호진이 앞길을 망치냐. 우리 집 희망이고 대들보인데 감히 네가.”(MBC <나쁜사랑>), “근본이 없다…우리 진우 잡아먹으면 어떻게 하냐.”(MBC <봄이 오나 봄>), “넌 나쁘고 모자란 애야. 그래서 버려진 거야.”(tvN <부암동 복수자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가족 단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틀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시각이 한국 드라마에서 하나의 문법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어 왔는데, 이제는 시청자들로부터 ‘구시대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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