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은 풀어야 한다

홍진수 정책사회부장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는 정복 전쟁 중 소아시아의 신전 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는 마차를 만났다.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 내려왔는데, 매듭이 어찌나 단단한지 아무도 못 풀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칼을 뽑아 매듭을 잘라버렸다. 예언대로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를 정복했다. 이후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영원히 풀지 못할 난제란 의미로 쓰인다. 알렉산드로스가 매듭을 풀지 않고 칼로 잘라버린 것은 ‘발상의 전환’이나 ‘과감한 결단’으로 통한다. 평범한 사람은 감히 하지 못할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의미다.

홍진수 정책사회부장

홍진수 정책사회부장

윤석열 대통령의 요즘 행보를 보면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알렉산드로스가 떠오른다. 대학수학능력평가(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제거해 사교육을 잡겠다는 발상이 그렇고, KBS 수신료 분리징수 밀어붙이기가 그렇다. 우선 윤 대통령의 거침없는 ‘킬러 문항 퇴출’ 과정을 보자.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 발언이 ‘쉬운 수능을 지시’한 것으로 해석되자 바로 다음날 대통령실은 “변별력은 갖추되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는 수능에서 배제하라”는 윤 대통령의 지시를 다시 공개했다. 그리고 교육부 대입담당 국장을 경질하고 수능과 모의평가 출제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감사를 지시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평소 이전 정부, 야당, 노조, 시민단체를 비판할 때 사용하던 ‘이권 카르텔’이란 표현도 썼다. 킬러 문항이 교육 당국과 사교육 업체의 유착에서 비롯됐다는 의미다. 19일에는 이규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임기를 2년 가까이 남겨두고 사임했다. 윤 대통령이 ‘킬러 문항 퇴출’을 지시한 지 나흘 만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9월 모의평가와 11월 수능에서 성공적으로 킬러 문항을 배제하고도 변별력 있는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것이다.

수능의 킬러 문항이 사교육비 증가를 부채질하는 것은 맞는다. 킬러 문항을 없애는 것은 야당과 진보성향 시민단체도 요구하던 일이다. 그러나 킬러 문항을 없앤다고 사교육 시장이 단숨에 쪼그라들 리는 없다. 사교육비 경감은 공교육을 강화하고, 더 나가서는 끝없는 경쟁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의 체질을 바꿔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 개혁을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킬러 문항은 사교육의 원인이 아니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낳은 결과물이란 생각도 해봐야 한다.

윤 대통령이 전면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KBS 수신료 분리징수 절차도 비슷한 흐름으로 가고 있다. 대통령실은 지난 5일 KBS 수신료를 전기요금에서 분리 징수하도록 방송통신위원회 등에 권고했다. 국민 참여 토론 과정에서 나온 국민불편 호소와 변화 요구를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방통위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지난 14일 회의를 열어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한상혁 위원장이 면직 처분을 받고, 야당이 추천한 최민희 위원을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아 현재 방통위 상임위원은 총 5명 중 3명뿐이다. 정부·여당이 추천한 위원이 2명이고 야당 추천 위원은 1명이다. 무엇을 안건으로 올리든 정부·여당 뜻대로 되는 구조다. 방통위는 입법예고 기간도 이례적으로 열흘만 뒀다. 지난 23일 법원이 한상혁 전 위원장의 면직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하면서 KBS 수신료 분리징수 절차에 걸림돌은 거의 남지 않았다.

수신료 분리징수를 무조건 비판할 일은 아니다. 방송 환경이 바뀌고 KBS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분리징수가 아니라 아예 폐지를 요구하는 여론도 많다. 그렇다고 밀어붙일 일도 아니다. 수많은 논란 속에 수신료 ‘통합징수’가 30년이나 유지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 수신료 분리징수를 논의하는 과정에선 그 이유였던 공영방송 재정 안정의 중요성, 공익 콘텐츠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알렉산드로스의 결단은 요즘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복잡한 일을 간단하게 해결하면 결국에는 실패한다’는 의미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대제국은 그의 사후 바로 해체됐다. 매듭을 풀지 않고 잘라버렸기에 예언이 실현되다가 말았다는 설명이 따라온다. 매듭은 자르기보다는 천천히 푸는 게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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