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위기와 국가 역량의 위기

충원율로 현상한 한국 대학의 총체적 위기는 연구·개발에 관한 국가 역량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은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지식을 생산·가공하고 새로운 사회적 의제와 담론을 내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교수·연구자들이 받는 임금과 존재 의미도 연구에서 나온다. 기실 연구의 위기는 이미 도래해 있었다. 기초학문은 물론 상당수의 분야에서 한국의 대학원은 공동화되고 있다. 한국은 필요한 지식·정보를 다루는 고급 두뇌를 길러내는 일을 사실상 미국(대학)에 의존하고 있다. 안보뿐 아니라 최고 단계의 교육과 지식·정보의 생산에 있어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속국이다.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연구’는 대학과 학회에서 생산·유통된다. 학회는 분야별 연구자 조직이며 전문 지식 생산의 세포 단위이다. 학회를 보면 대학과 전문가 및 지식인 사회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다. 한국 학계는 이제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 성과를 양산하며, 구미에서 배워온 학술지 운영과 동료평가 등의 절차를 통해 나름 제도화·합리화되어왔다. 연구자들은 자기 학문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논문을 쓰고 학회 활동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 교수·연구자로 사는 인간들의 이해관계와 이권도 걸려 있기에, 제도화된 학회와 학술활동의 이면에는 치사한 기득권 구조와 지저분한 비위도 있다. ‘스펙 품앗이’를 위해 특권층 교수들이 짜고 지인의 고등학생 자녀를 논문의 제1저자로 만들거나, 자기 자식을 공동 저자에 끼워넣은 일들도 학회와 학술지를 통해 저질러진 것이었다. 한국 학술사나 지식인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흑역사’일 이런 일들은 보수·진보, 이공·인문계를 넘어 계급 세습에 학술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경우다. 또한 한국의 학회에는 대학의 극심한 불평등 구조가 반영되어 있다.

요즘 교육부(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평가주기를 맞은 학회들은 평가 자료와 지표를 정리하고 맞추는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다. 학술지 평가는 학회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그래서 일부에선 논문 게재율 같은 지표를 올리고 꿰맞추는 ‘조작질’이 행해진다. 또 연구자 개인이나 학술지 평가에서나 인용지수가 중시되니까, 새로운 모럴 해저드가 생겨나 투고자들에게 자기 학술지의 논문을 몇 편 이상 인용하라 강요하는 일도 있다. 대개 이런 일들은 학회의 간부직에 앉아있는 정규직 교수들의 지시로 이뤄진다.

이런 조작과 부정은 등재 및 평가제도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졸렬하고도 애처로운 발버둥인데, 상당수의 학회가 자생력이 없고 연구자들의 자율성과 연대가 약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파편화되어 각자도생에 힘겨운 연구자들은 대학과 학회에서 학문적인 것 외의 다른 요소를 물리치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잃고 있다.

그래도 다음 두 가지를 같이하여 고쳐나가자고 연구자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첫째, 개별 학회 일에 매몰되지 말고, 학회 운영을 공공화하고 작은 학회들은 연대해야 한다. 학회 안에서 종속적 지위에 있는 신진이나 비정규직 학자들은, 대학과 학계의 구조적 불평등의 매트릭스 때문에 학회 활동을 열심히 할수록 더 가난해지거나 사회적으로 무능력해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학회를 골목대장 노릇에 쓰는 일부 정규직 교수들의 전횡에 협조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이 싫어서 대학이나 학회를 떠나는 독립연구자가 많이 늘고 있다. 당연히 이해가 가지만 독립연구자들에게도 연대와 조직이 꼭 필요할 것이다.

둘째, 국가의 학술 지원과 관리 제도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국가와 한국 연구자들 사이의 관계는 양가적이다. 한국처럼 거대한 학술 관리 및 등재 제도에 연구자가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내맡기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논문 DB판매업자와 족벌사학 같은 ‘업자’들의 그악스러운 착취와 몰염치보다는 공적 제도가 나은 면이 있다. 대학의 문제가 바로 그렇지만 구성원의 수평적 관계와 민주적 거버넌스가 없으면, 자율성이란 사적소유자의 절대권력과 착취의 자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의 위기가 곧 총체적 국가역량의 위기라는 점을 위정자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지역 대학의 위기 앞에서 지자체와 대학들이 머리를 맞대려는 것처럼, 대학으로부터 쏟아져나올지 모르는 두뇌를 시민의 삶을 위해 활용하고 국가 연구·개발 능력을 보존하기 위한 총괄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한국연구재단, 경제인문사회연구회, KDI,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등 국책기관의 역할을 잘 재조정하고, 이 모두를 관장할 학술진흥청이나 국가학술위원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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